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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아너드

까마귀 이야기 - 12화(2)

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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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이 멍청한 녀석!!”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 끝을 찌르고, 허공에 산란된 파편들은 화창한 던월의 햇빛을 반사한다. 나사며, 렌즈며, 태엽이며, 톱니바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조각이, 누군가가 공들여 만들었을 그 걸작품이, 고작 그 한 발의 총알을 이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그 과정을 관찰하면서, 예기치 못한 승리를 목도하면서, 다우드는 이제껏 느낀 적 없는 허무감에 휩싸였다. 곧이어 남자의 머리에서 분출하는 붉은 피와, 온기를 잃고 쓰러질 그 몸이 저절로 상상이 되고 있었다. 그의 검은 여전히 허공을 긋고 있었고, 그의 다리는 여전히 남자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딛고 있었다. 남자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을 향하고 있었고, 그의 혈관을 단숨에 끊은 다음 모든 피를 찬 공기 속으로 빨아들이게 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 더 싸울 수 있었는데. 아직 더.....

다우드, 다우드. 그들은 자신을 도운 대가로 남자의 몸에 독을 흘려넣었고,

그 알 수 없는 절박함 가운데로 다시 방관자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방관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지난 밤 꿈 속에서 다우드의 고통스러운 베갯맡에서 속삭이던, 검은 눈을 한 신의 과거의 환청에 불과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우드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온 힘을 다해 일갈을 날리고 싶었다. 격분을 압도하는 실망감이 없었더라면, 그 일갈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래, 이 빌어먹을 검은 눈의 짐승아. 내게서 또 뭘 바라는 거냐?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 아무리 잘 드는 보검이라도 자기 손가락이라도 베이면 버릴 궁리부터 하는 게 사람 심리야. 내가 그것을 모를 줄 알았나? 음지 속에 옹송그려 살던 이 던월의 검이? 조금이라도 두각만 나타내면 자신의 뒤통수를 칠 까봐 두려움에 벌벌 떨어대는 인간의 간사함을 몰랐다고 생각하나?'

자신들을 영달과 명예의 길로 올려놓은 대가로, 그의 머리통에 한 발의 총알을 박아 넣었다.

‘그래, 맞아. 유산을 타먹으려고 내게 의뢰를 넣었던 막내아들, 꼴 보기 싫은 숙모의 죽음을 바랐던 귀족 한량, 나에게 의뢰를 넣는 놈들 중에는 그런 족속들이 제법 있었지. 유언장 한 장과 증서 한 장만으로도 수십 년에 걸쳐 쌓인 애정은 순식간에 와해되고, 가문 안에서 작은 내전이 벌어졌어. 그리고 그들은 그럴 때마다 자기네들 손 대신, 내 손에 피를 묻혀줄 것을 요구했지. ‘

그리고 무수한 상처를 새겨가면서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건 대가로 바다에 그의 시신을 가라앉혀 버렸다.

'너는 모른다, 방관자여.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수천 년도 더 산 네놈이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너와 우리들 사이에 놓인 간극은 판디시아의 끝과 끝을 열 곱절 해놓은 것보다 더할 거라고. 하! 우린 욕심이 많아. 돈이든, 색욕이든, 사랑이든, 친구든, 권력이든, 뭐든 간에. 그리고 그 욕심을 메우기 위해서라면 돈과 색욕, 사랑, 친구, 권력, 그리고 신의와 믿음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것이 사람이지. 그리고 '이럴 수밖에 없었어.' 라는 식으로 변명을 해대면서, 약간이라도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더하려고 한다. 그걸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알고 있었을 네놈이, 도대체 무슨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나를 괴롭히는 거지? 또 그놈의 '새로운 즐거움'을 위해서인가? 썩 꺼져라, 방관자여! 제국은 이미 몰락해가고 있어. 남자는 다시 죽었어. 네 흥미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나 찾아보란 말이다!'

그래, 그 말이 맞단다, 다우드. 귀여운 이 친구야. 넌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 네 목숨을 위협하는 자가 사라진 것에 안도하고 있나? 너의 호전성을 만족시켜줄 상대가 허망하게 사라진 것에 절망감을 느끼나? 이도저도 아니라면 참회와 용서, 그 옛 현자가 말하던 소위 광명의 재림을 놓친 것이 안타까운가? 그렇지만 하나 지적해둘 것이 있는데, 너의 실망과 번민은 아직 약간 이르다. 네가 원하는 순간은 아직 계속되고 있으니, 조금 더 그 순간을 만끽해보도록.

"뭐."

과거의 환청은 어느새 초월자의 현재의 목소리가 되어 그에 곁을 떠돌고 있었다. 짧은 머리, 오래 전에 유행이 지나간 갈색 재킷에, 검은 눈을 한 청년이, 바로 그들의 곁에서 달콤한 저주를 속삭이고 있었다. 다우드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총알을 피하려다 균형 잃은 남자의 다리는 어느 새 자신의 체중을 지지하고 있었다. 옆으로 꺾인 남자의 머리가 다시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다우드는 그제야 알아챘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남자는 ‘두 번 다시’ 같은 수에 당하지 않았다. 가면 오른편은 고스란히 그 충격을 받아내며 산산조각 났고, 너덜너덜한 후드 단 사이로 6개월 간 깎지 못한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가면의 틈새로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오욕과 저주에 물들어버린 창백한 피부였다. 그 다음에는 한쪽 눈이 드러났다. 파편을 뒤집어쓴 살갗 위 생채기에서 흘러나온 액체는 검은색에 가까웠다. 검은색 액체는 남자의 흰자위로 흘러 들어가 얼룩을 남겼다. 남자의 커다랗게 떠진 얼룩덜룩한 눈 가운데, 메마른 푸른 빛이 다우드를 직시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않았나. 너희들은 모두 특별한 인간들이라고.

다우드는 무어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소름 끼치는 푸른 빛에, 그 빛에 실린 원망과 비탄의 무게에 무어라 변명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날아온 남자의 맹렬한 박치기가, 그의 말과 생각을 가차없이 끊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다.

"!!"

머리가 하얗게 되는 고통에 눈앞에서 불이 튀는 듯 했다. 이윽고 남자의 발이 명치로 직격으로 박혔다. 가슴을 감싸 쥘 여력도 없이, 다우드의 몸은 남자 쪽으로 거칠게 당겨졌다. 아, 멱살을 잡혔구나. 그 생각이 끝나기야 무섭게 억센 주먹이 그의 뺨을 강타했다. 하얗고 붉게 점멸하는 그의 세상 속에 빨간 피 몇 방울이 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의 총알은 마치 남자의 이성을 끊어놓은 듯 했다. 남자는 검의 존재를 잊기라도 한 듯이, 온 힘을 실어서 다우드를 구타하고 있었다. 다우드는 희미하게 아웃사이더가 한 말을 되새겼다. 머리통에 한 발의 총알. 그래, 그렇게 나쁜 체험을 했을 테니, 이렇게 화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마침내 암살자의 손에서 힘이 빠지면서 검이 툭 떨어졌다. 가차없이 가해지는 충격에 몸을 추스를 기세라고는 씨알만큼도 남아있지 못했다.

과연 호국경이야.

다우드는 진심인지 냉소인지 모를 혼잣말을 뇌까렸다. 이제 남자는 멱살을 놓았고, 다우드는 얼굴이며 배며 가슴이며 할 것 없이 골고루 얼얼한 온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상이 삐뚜스름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는 삐뚜스름하게 서 있는 남자가 자신의 검을 단도마냥 토마스에게 집어 던지는 것이 보였다. 긴 검은 거짓말처럼 날아가 어깨에 박혔고,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거칠게 토마스에게 걸어간 뒤 검을 앞뒤로 비틀면서 뽑았다. 왼손을 걷어차자 총이 저만치로 날아가 버렸다. 총은 애처롭게 날아가 버렸고, 그것이 떨어지는 소리는 그 청년의 가쁜 신음소리로 인해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토마스를 거칠게 일으킨 뒤 검날을 목에 가져다 댔다. 방독면 밑으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코르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남자는 뒤를 돌아봤고, 황급히 화살 한 대를 피했다. 눈이 가늘어졌다.

"멍청이 같으니라고, 지금 뭐 하는 거지? 나와 결투하고 있지 않았나?"

도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우드는 피식 웃었다. 이제 토마스에게 시선이 옮겨간 저 사내에게서 도망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다니, 그야말로 고래잡이의 작살에 제 급소를 내미는 고래 꼴이 아니던가. 아까 저 남자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종잡을 수 없다고 비웃은 게 언젠데, 이제는 자신에게도 그 변덕이 옮아 붙은 게 틀림없었다. 검을 들었는데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남자는 토마스를 신발 던지듯 바닥에 떨구고, 눈 깜짝할 새 다우드의 눈 앞에 나타났다. 비록 한쪽 눈에 불과했지만, 다우드는 이제 그토록 궁금했던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남자는 한쪽이 깨져 이제 거치적거릴 것이 분명할 텐데도 가면을 벗을 생각조차 없는 듯 했다. 남자의 눈빛에는 이제 경멸의 빛이 어려있었다. 그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이 터덜터덜 다가오더니, 다우드의 공격을 가볍게 두세 번 막았다. 이제 다우드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그의 발은 이제 무너진 건물의 가장자리에 있었고, 한 발이라도 뒤로 물러난다면 저 밑으로 추락할 것이 뻔했다. 그는 이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 사실을 확정 짓기라도 하듯이, 남자는 다우드의 방어를 너무나 쉽게 뚫은 뒤, 그 손에서 검을 튕겨냈다. 검이 저 밑에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

이제 남자의 검은 자신의 턱 밑을 겨누고 있었다. 다우드는 자신을 응시하는 그 눈을 쏘아보았고, 남자는 태연히 그 시선을 받아냈다. 경멸과 무시로 팽배했던 그 눈빛은 6개월 전 고래잡이들에게 둘러싸여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날서 있었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 남자는 이미 다우드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남자는 검을 내리는가 싶더니, 다우드의 팔뚝을 재빠르게 찔렀다.

"윽!"

상처를 감싼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남자는 그의 무릎을 걷어차 그를 주저앉게 만들었고, 한 손으로 멱살을 잡은 뒤 거칠게 그를 들어올렸다. 물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후드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가닥이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뿌연 먼지로 잔뜩 더럽혀져 있었다. 턱에 닿은 남자의 손가락은 몸서리쳐지도록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뒤, 발 디딜 곳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선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다우드, 기분이 어떤가? 그나마 남아 있던 온기는 차갑게 식어버린 지 오래고, 희망과 열정으로 차 있었던 심장은 절망과 냉소의 고통으로 산산이 찢어져버렸지. 그를 질식시킨 바닷물은 미처 마르지도 않은 상태군.

"버러지 같은 놈이군. 번드르르한 소리 따윈 집어치워. 방관이라는 단어를 이름표에 걸어놓은 주제에 결국 네 호기심과 오락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운명 따윈......으, 그냥 인형극 한 판일 뿐이겠지. 그래, 영생과 전능함을 양 손에 쥐고 있으니 우리들의 인생극에 공감할 수 있을 리가 없을 거라고, 이 개자식아......그래, 고래가 있었지. 간밤에 토마스 녀석이 바다에서 고래를 봤다고 했어......아무렴, 이런 사태에 네놈이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리가 있나......"

뜬금없는 혼잣말에도 남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저 남자에게도 이 검은 눈을 단 개자식의 속삭임이 들리는 걸까?

여덟 명이다, 다우드. 이 세상에 여덟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선택 받은 이들. 선택 하나하나로 단조로운 역사에 짧지만 강한 족적을 남기고, 기어이 역사를 뒤틀어버리는 그런 살아있는 변수들이 동시대에 여덟 명이나 있다. 제법 재미있지 않겠나? 네게 검을 들이댄 저 남자를 봐라. 코르보 아타노, 최초의 외국인 호국경, 최초의 황제 암살자인 호국경. 흥미롭지. 너와 생김새와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살아온 길은 놀랄 만큼 서로 닮아 있으니 말야. 사생아 혹은 고아. 뛰어난 전사. 내 예상을 언제나 빗나가는 자. 내게 즐거움을 주는 자. 어찌 질릴 수 있겠나? 적어도 이들의 선택의 끝을 봐야 한다는 집념이 들더군. 어떤 결말을 맞이할 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저토록 강한 집념과 고집을 지닌 이는 특히 내 구미를 돋구지. 이미 감옥을 탈출하기 전부터 생명의 가망이 없었는데도 복수심과 애정만으로 시체 같던 몸을 이끌고 있었으니.

"뭐?"

하이람 버로우즈가 어떤 인간인지 너라면 잘 알겠지. 오랫동안 시달렸으니 아주 잘 알거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던월의 검이든, 호국경이든, 수십만의 던월 시민들이라도 기꺼이 던져버릴 그런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지. 그만큼 흔해빠졌지만. 여제를 암살했다는 정황이 명확하니 반역자로서의 불명예는 씻을 길이 없고, 사형 선고를 당했으니 그 생명이 살아있을 가치 또한 없다. 그런 죄수에게 집행 날짜까지 필요한 건 최소한의 생명이다. 참수대에 묶여 온 시민들의 비난과 야유, 저주를 받아내고, 도끼가 머리를 찍어버리기 직전까지 붙어있을 정도의 생명 말야. 그 꼬마가 그것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 테니, 자연히 전직 호국경에게 필요 이상의 힘을 남겨놓을 필요성은 애시당초 느끼지 못했을 거다. 게다가 그 편집적인 모습이라니! 내가 그를 엿볼 때마다 그는 걱정투성이였지. 네가 변심해서 자신의 머리가죽을 벗길까 하는 걱정에, 감옥 밑의 호국경이 땅에서 솟아나 자신의 목을 부러뜨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정신적으로 굴복하지 않는 호국경을 죽지 않는 수준에서 육체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해 고문을 어떻게 했을 것 같나?

다우드는 진심으로 남자가 방관자의 이 말들을 듣지 않길 바랐다.

자, 다우드. 이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하도록 하자. 저 물자국을 따라가 보라. 그가 걸어온 길마다 흘려온 저 물자국을. 눈을 돌리지 마. 총알이 그의 머리를 관통하는 순간이 보이나? 남자의 집념, 죽음에 인접했으면서도 그 몸을 움직이게 하는 보호본능으로 소녀에게 다가가는 그 힘을 목도했을 때, 해블락은 주체할 수 없는 공포에 질렸다. 어떻게 보면 대섭정과 비슷하지.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쫓아내기 위해,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바닥에 흩어지는 피, 두개골 파편들. 그 남자의 딸과도 같은 소녀는 그 광경을 빠짐없이 목격했지. 남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서 소녀의 손을 잡는다. 머지않아 그 손을 누군가가 강제로 떼어내겠지. 그리고 남자는 바다 속에서 수장 당할 것이다. 조금 더 전으로 돌아가 보자. 남자는 왕당파를 신뢰했다. 자신이 의존할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가운데, 복수를 거행할 무장을 빌려주고, '코르보 씨, 굉장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진심으로 위해주는 이들을 오랜만에 만났지. 어떻게 보면 태어나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경험일 수도 있겠군. 제법 오랜 기간을 고통과 소외 속에서 보낸 그에게 그 응원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했겠지. 자신을 응원해주던 이들이 축배에 넣은 독을 남자는 그대로 마셨다. 티비아 산 특제 맹독이지. 독을 탄 것은 뱃사공이다. 늙은 뱃사공은 겁에 질려 있었어. 자신을 협박하는 왕당파의 앞에서 그 늙은이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지. 너와 그 남자처럼 완력, 결단력, 마법이 있지 못했으니까. 조금 더 뒤로 돌아가 보자. 네가 분해할 만한 장면이군. 하이람 버로우즈, 자신을 올가미로 얽어 매는 것도 모자라서 무고죄를 뒤집어씌워 일개 사형수이자 반역자로 삶을 마치게 할 뻔했던 저 대섭정을 처형하고 있어. 여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소녀를 비탄에 몰아넣은 그 자에 대한 호국경, 나라의 상징인 황제의 암살자에 대한 처형이다. 그 꼬마에게 있어서 생애 최초이자 최후, 최대의 공포였겠지. 이제 보일 여사를 기절시키는군. 남자가 받은 임무는 '암살'이었지만, 그는 일부로 '납치'라는 대책안을 선택했어. 자신을 괴롭히던 여제의 망령, 사랑하던 여인을 죽이는 그 순간을 다시 제 손으로 되살려내느니, 남자는 차라리 자신의 목을 베는 길을 택했겠지. 쌍둥이를 광산에 보낸 것 또한 그의 사심이 담겨 있었던 데에서 비롯한 것일까? 가학적인 그 두 형제가 소녀에게 무슨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분노감에, 골든 캣의 여자들이 당하는 일들을 알게 된 격분감에, 남자는 그들에게 지금까지 받은 고통을 조금씩 갚게 한다는 처벌을 택했다. 소녀를 구해낸 직후 남자는 그 아이가 무슨 일을 당했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소녀는 여전히 명랑했지. 비속어를 몇 가지 배웠다는 것을 제외하고. 위선자인 캠벨에게도 이에 응당하는 대가를 줬지. '이교도'인 너에게는 잘된 일이지 않은가? 제국의 질서를 이끄는 교단의 수장이라는 자가 정작 온갖 음행과 기행을 일삼았고, 결국에는 진짜 '이교도'에게 그 낙인을 찍히고 쓰레기처럼 수해지구에 버려졌지. 결국 그 자는 우는 자 특유의 광기에 휩싸여서 자신의 지나간 과거를 부르짖고, 지금 몰골을 저주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졌어. 그래도 두 번째로 남자와 만났을 때에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도 좋겠지.

자, 이제 조금 더 뒤로 돌아가 보자. 좁고 차가운 물살을 헤치면서, 자유를 되찾기 위해 하수구를 내달리던 그 순간보다 더 뒤로. 넌 이곳을 알고 있을 게다. 네가 방문했을 때와는 약간 풍경이 달라졌겠지만 이미 네가 주시자로 변장한 채 한 번 온 적이 있는 곳이지. 다우드, 고개를 돌리지 마라. 네가 바라는 것이 단순한 승리이든, 위선 어린 참회든, 진심의 속죄를 바라든 간에, 너는 이것을 알기를 원했지. '던월의 검'을 향한 무시무시한 집념을 지닌 남자, 코르보 아타노가 어째서 죽음을 넘어서까지 모든 이들에 대한 피의 복수를 원하는지 말야. 자, 남자는 콜드릿지 감옥으로 끌려왔다. 진실을 가장한 진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지. 처음에는 단순한 구타로 시작했다. 주먹과 발, 채찍이나 몽둥이와 같은 것들이지.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단순한 구타로 늑골 몇 대를 금 가게 하고, 팔 한 대를 부러뜨리는 것으로는 호국경으로부터 거짓 자백을 이끌어낼 수 없었던 거야. 그 다음에는 물고문이었다. 이것도 단순한 것이지. 5분 정도 물 속에 머리를 쳐박고, 호흡을 막아서 질식사에 대한 공포심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니까. 아니면 얼굴에 얇은 천을 덧댄 다음에 물을 천천히 붓는 방법은 어떨까, 하고 고문관은 떠올렸다. 물을 먹은 천은 혀로 밀어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착 달라붙으니 말이다. 뒤로 손을 결박한 다음에 천천히 들어올리면 대개 사람의 관절은 그 체중을 버티지 못하지. 너는 아까 그의 손을 봤더군. 그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고, 모든 물음에는 '아니오'도 아닌 절대적인 침묵으로 일관했어. 버로우즈......그 가엾을 정도로 열등감에 시달리던 그 꼬마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손가락을 언거푸 짓밟았지. 그것으로 인해 남자의 손가락뼈에 금이 갔고, 손톱 몇 개는 으깨졌다. 물론 고문관은 그것을 상한 것과 성한 것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뽑았지. 전부 다 뽑지는 않았던 것이 다행이야. 전부 뽑았더라면 검을 쥘 정도로 손에 힘을 줄 수 없었을테니. 종종 기절하다보면 자백을 들을 기회조차도 잃게 되니, 그들은 가끔은 약도 썼고, 가끔은 잠을 재우지 않았다. 사흘 정도면 어지간한 죄인들은 두 손을 들기 마련인데, 그래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어. 기력이 쇠해지고 졸 때마다 거칠게 구타당했지만 그 정도는 끄떡없었지. 그가 지내던 감방은 교묘한 위치에 있어서, 해가 잘 들지 않았지. 던월은 별나게 해가 들지 않는 편이었지만, 감옥의 위치상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늘 정도였다. 점점 쇠약해지면서 추위에도 약해졌고, 자주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어.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곳의 담요로도 익히 버틸 수 있겠지만, 이미 몸 여기저기가 망가진 상태로는 작은 추위조차 버거워하게 되었지. 상처가 낫는 데에는 이미 평소의 배 이상의 시간이 들었고, 간신히 딱지가 앉을라치면 어김없이 새로운 상처가 덧입혀졌다. 더군다나 버로우즈는 호국경이 식사를 하는 것조차도 싫어했지. 정작 그는 감방 근처에 들어온 적도 없는데 말이야. 곰팡이 피기 시작한 음식을 먹는 것은 너의 많은 부하들이 체험해본 적이 있을 테지만, 그것조차도 적게 주어졌고, 나중에는 장기 기능이 약해지면서 소화조차도 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고문관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치명적인 상태에만은 이르지 않았지. 지나치게 추울 때에는 뜨겁게 달군 쇠로 그의 등이나 가슴을 강제로 지지기도 했고......

"그만!"

'넌 그녀를 지킬 수 없어.' 익숙한 말이지 않나, 다우드? '네가 그녀를 죽였어'라는 너의 내면의 목소리처럼, 남자는 고문에서 벗어나 침대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어김없이 이 환청을 들었지. 의식이 선명할 때에는 육체적 고통이, 의식이 혼미할 때에는 정신적 고통이 그를 좀먹어갔다. 호국경으로서 그는 굳건하고 의연했다. 버로우즈는 그것을 썩어빠진 근성이라고 불렀고, 독한 놈이라고 불렀지만, 실상은 약간 달랐지. 그는 채찍이나 주먹이 아닌, 바로 그 목소리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자신의 눈이 날카롭지 못했던 것, 자신의 손이 두 사람을 끌어안지 못했던 것, 자신의 심장을 그들을 위해 희생하지 못했던 것, '넌 그녀를 지킬 수 없어', '모두 너의 탓이다'. 모든 화살은 그를 향했고, 곪을 대로 곪아 진물을 흘리는 그의 상처를 후벼 파기 시작했다. '너 때문이야, 모두 너 때문이야' '그 사람들의 원망에 가득 찬 눈이 보이지 않느냐', '어떻게 감히 그런 죄를 저지르고,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거짓을 자백하려 하느냐'? 그의 굳건함은 반은 그의 의지였고, 반은 그의 강박에서 기인했지. 자신의 실책 때문에 고통을 받은 그를 위해서라도 그는 경멸을 대가로 받는 안온함 대신 분노와 질시 어린 고통을 선택했다. 그가 죽는다면 그것은 버로우즈의 사심 가득한 고문 때문이 아니었을 거야. 그의 죄책감, 후회가 그를 죽였겠지. 뭐, 엄밀히 말하자면 그 시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고문 후유증 때문에 오래 가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정말 매력적인 사내야, 그렇지 않나, 다우드여?

"전혀 아니야, 전혀!"

재밌게도 간수들이라고 해서 모두 죄인들에게 무자비한 법의 집행자인건 아니라는 거지. 소프라는 감시관은 처음에는 반역자이자 암살자에 대해서 순수한 증오심으로 가득했어. 호국경이었던 자가 받는 고문과 처형은 일련의 죄로 미루어볼 때 받아 마땅한 것이었지. 그러나 고문관의 고문에도 버텨내던 남자가 다른 무언가로 인해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마음이 점점 흔들렸다.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시달리게 된 거야. 그는 '어쩌면'이라는 단어에 매달렸지. 만일 그가 죄가 없다면?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거라면? 그리고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이 왕당파의 매수였다. 그는 자신의 안위와 왕당파의 당위 사이에서 줄을 탄 끝에, 후자를 택했어. 처형 전날이라는 아슬아슬한 날에 빵 안에 감춰둔 열쇠와 쪽지를 들고서, 최후의 만찬-이래봤자 그냥 빵이었지만-이라는 명목으로 남자에게 배달했다. 물론 소프도 인간인지라 마지막까지 망설였지. 만약에 들킨다면 두 개의 목이 날아갈 테니까. '코르보, 친구가 보내온 사식입니다.' 그 말 한마디를 그토록 망설였지. 봐라, 다우드. 그의 말에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만신창이가 된 몸, 처형 전날까지도 집요하게 입은 상처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고름을 흘리는 몸을 일으키면서, 차가운 돌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소프를 노려보지 않느냐? 이제까지의 죽어가던 죄수의 눈동자도 아니고, 냉철한 호국경의 눈동자도 아닌, 악과 독에 받혀서 증오로 뒤집혀진 그 시체의 형형한 눈동자를 봐라. 처형을 24시간 앞둔 그 순간에서야 그 죄책감과 힐난의 굴레 속에서 그는 소리 없이 복수의 끈을 잡았고, 자신에게 그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지. 나는 아무것도 돕지 않았지만 말이다. 소프는 그 눈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도망갔다가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무형의 공포에 휩싸였어. 그래서 정해진 대사를 읊은 뒤, 정해진 행동을 하고 도망쳤지. 장하다, 다우드. 그는 비록 꼬리를 밟혔지만, 너는 그를 변덕스러운 온정으로 구해냈지. 지금쯤 그는 그 주시자 행세를 하는 누군가에게 몹시도 감사해하고 있단다. 다시 돌아가 볼까. 남자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을 일으키고 물을 들이키고, 빵을 조금 먹었다. 그 동안 무기력이 지배하고 있었던 그의 몸을, 뒤늦게야 살기 위한 욕망이 가득 채운 거지. 이제 그의 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여제의 망해가 아닌, 자신에게 손을 벌리고 있는 소녀였다. 호국경 시절의 그 강건한 몸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 복수심, 집념, 애정을 연료 삼아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고 탈주극을 벌이기 시작한 거야. 그 결과 버로우즈는 목이 부러져 죽었고, 고문관은 손가락이 모조리 잘리고 힘줄이 끊어진 뒤, 뱃가죽이 뚫어지고 내장의 태반이 익을 때까지 인두로 복부를 지져지는 고통을 맛보면서 죽었지. 남자가 당한 것에 비하면 과분하게 행복한 죽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6개월의 고통을 한 번에 돌려줄 시간이 없었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복수임과 동시에, 공주에게 웃음과 평안을 되찾아주는 일이었으니까. 너희들이 고래들을 고문해서 기름을 쥐어짜듯, 그 혼탁한 감정을 쥐어짜내면서 남자는 나와 만나 그 표식과 함께 힘을 부여 받았고, 자신의 죽어가던 몸을 되살려 네 명에게 복수를 감행했다. 그리고 죽었다.

"......"

코르보, 그 때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다우드는 묻는다. 대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남자는 천천히 손을 뻗고, 그 소녀를 끌어안을 참이었지. 그렇지만 그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마룻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그의 피였고, 그의 손은 마룻바닥을 간신히 긁었어. 폐부를 썩히는 독, 기도를 막는 피에 질식하면서도 그는 손을 뻗었고, 천만다행으로 그 손은 소녀에게 닿았다. 남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지. 술을 들이키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었지. 그는 남몰래 짜는 계획이 있었지. 마침내 그와 소녀, 두 사람이 소녀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에 벌일 비밀스러운 계획 말이야.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 성대한 대관식을 올리고, 국정에 돌입하면 소녀는 귀족과 의회에 둘러싸여서 고단한 나날을 보내게 되겠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암살의 위협에 맞서서 소녀의 동심은 빠르게 시들어갈 것이다. 공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슬픔을 달래던 나날은 이제 끝을 맞이할 것이고, 냉혹한 현실에 맞서서 여제의 위치에서 철저한 군주의 길을 걸을 날만이 남았지. 자신처럼 너무나 어린 나이에 유년기의 끝을 맞이한 것을 남자는 가슴 아파했고, 짧게 소녀와 소풍을 갈 계획을 짜 두고 있었어.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이 안정을 되찾는 순간, 두 사람이서 손을 맞잡고 서코노스의 해안을 걸으면서 서로의 비극을 위로하고, 앞길을 의논하는 그런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결국 못 이뤘지만 말야.

다우드는 저만치에서 본 남자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아직 제국의 영광이 미미하게나마 살아 있던 시절, 흰 옷을 입은 꼬마 숙녀는 남자에게 달려들어 그 커다란 품에 안겼다. 방금 전까지의 기습으로 한껏 긴장해 있었던 남자는 겁에 질린 소녀의 체온을 느끼면서, 여지껏 본 적도 없는 애정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그 아이를 쓰다듬었다. 그와 비슷한 자식이 없었던 다우드로서는 낯선 광경이었다. 그러나 낯선 것이라고 해서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 오르는 감정마저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단란한 한때를 짓밟고, 모든 비극의 포성을 울린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 다우드. 네가 알기를 바랐던 것은 여기까지다. 그 포성이 너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또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둬라. 너는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모든 짓을 다 했지. 효율성과 편리함을 위해 당연했던 살인과 고문을 기꺼이 포기하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으면서 너는 갱단들과 교섭을 하고, 정당한 파업을 돕고, 마녀들의 수장을 끝장냈어. 그리고 에밀리 칼드윈이 매춘굴에서 구출 받을 단초를 제공했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적어도 그 소녀는 아버지와도 같은 이와 재회할 수 있었고, 그녀의 가정교사와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었으니 잘된 일이야. 그러나 너의 목숨을 쥔 자, 코르보 아타노는 그 사실을 모르지. 그에게 있어서 '던월의 검'이란 사랑하던 이를 죽이고, 사랑하던 아이를 빼앗아가고, 사랑하던 일상을 갈취해간 자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너의 앞날은 이제 코르보에게 온전히 달려 있다. 다우드......네가 죄책감을 느끼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다. 과연 지금까지 너의 선택들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 것인지 지켜보도록 하마.

'그래, 이게 방관자지.' 다우드는 끝까지 자신을 약올리는 전능한 존재를 비웃었다.

이제 그는 다시 남자에게 붙잡혀 있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섬뜩한 해골가면은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따고, 밑으로 던져버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우드는 뜬금없이 해골은 죽음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칼날이 그의 목 밑으로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이를 위해서 사신이 직접 내려오기라도 한 건가. 거참 웃기군.'

그는 본래 죽음에 초연했다. 암살자이자 이교도인 이상, 곱게 생을 마감하리라는 사실은 바란 적도 없었으며, 바랄 수도 없었다. 죽음이란 예고장과 함께 얌전히 찾아와, 망자의 마지막 식사를 지켜본 뒤에 그를 조용히 데려가는 길동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밤중의 심장 발작이나 고통스러운 토혈, 오한과 고열처럼 급작스럽고 추한 공격을 가한 뒤에, 그 단말마가 끝날 틈도 주지 않고 질질 끌고 가는 처형장 간수와 같은 존재였다. 어떠한 애원과 어떠한 변호인도 통하지 않는 무자비함을 겸비한 그런 간수에게, 이제 그는 끌려갈 참이었다.

남자는 검을 치켜들었고,

'그렇지만 죽고 싶지 않아.'

다우드의 목을,

“코르보.”

갈라진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부탁이야. 목숨만은 살려다오.”

남자는 멈칫했다. 그 검은 살짝 다우드의 목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종이에 베인 것처럼 얇은 상처가 나 있었지만, 그 이상 손에 힘을 주지도 못했다.

“알아. 염치없는 짓이지. 네 가족을 빼앗고, 명예까지 잃게 한 데다가, 목숨까지 잃게 만들었지. 그 주제에 목숨 구걸이라니, 파렴치한 놈이라고 생각해 마땅할 거야.”

처연하게 웃었다.

"내 단순한 행동이 그렇게 큰 파국을 불러올 줄 몰랐다고 변명하지는 않으마. 그건 그냥 핑계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지금 내가 모든 일의 일부시종을 알고 있는 이상, 과거의 내 모습이 언제까지 변명거리가 되겠나? "

'방관자여, 너는 내게 죄책감을 느끼냐고 물었지. 그래, 느꼈다. 나는 죄책감을 느꼈어. 내 돈에 대한 욕심과 알량한 자기합리화로 행한 단 한 번의 암살이 이토록 큰 후폭풍으로 되돌아오리라고는 몰랐지. 고래잡이의 수장이라고 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나는 어차피 100년도 가지 못할 인간에 불과한데. 먼 앞날을 바라보면서 내 행동을 고민하기에는 나는 정말로 무지한 인간이었다. 죄책감을 눈 앞에 두고 나는 미미한 속죄라도 하려고 애를 썼지. 에밀리 칼드윈의 목숨을 구하고, 딜라일라를 공허로 영원히 추방하면서 말야. 그래도 여제는 돌아오지 못할 테고, 그 소녀는 나를 영원히 용서하지 못하겠지. 내가 입이 백 개인들 할말이 있을까? 그 소녀가 나를 냉랭하게 바라보고 '복수하겠어'라고 말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뜯겨져 나갈 것 같더군. 폭력으로 잊으려고 한 것이다. 책임을 마주하고 그것을 수행해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도피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야. '

바닥에 내던져진 토마스가 저만치에서 버르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눈가에 주름이 졌다.

"입이 천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렇지만 모든 진실을 알고 내 업보를 모두 깨달으니, 오히려 살아있는 쪽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야. 살면서 속죄하겠다는 뻔뻔스러운 소리는 하지 않으마. 내 주제에 과분한 말이니까. 암살자의 일도 이제는 끝이다. 던월을 영원히 떠나고,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마. 이제 '던월의 검'이라는 호칭 따위는 집어 던지고, 차라리 비렁뱅이로 사는 것을 택하겠어. 남의 행복을 대가로 쌓아 올리는 명예를 선택하느니, 차라리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거지로 생을 마치마. 무슨 일이 벌어질지라도, 그 고통은 모조리 감수하겠어.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는 삶을 살게 되더라도 상관없으니까. 물론 이건 이 늙은 놈의 바람이다. 네가 지금 나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당해도 싸지. 그렇지만 제발 부탁이야, 코르보. 만약 내가 죽더라도, 네가 내 시체를 찢어발기고, 불에 태우고, 개밥으로 만들어도 좋으니까, 제발,"

남자의 검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이상하게도 다우드가 아닌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저 녀석들만은 손대지 말아줘. 나만 죽여."

남자의 눈이 커졌다. 다우드의 옆구리를 날카로운 칼끝이 파고들었다.

"!!!!"
"안 돼!"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우드를 여전히 움켜잡은 채로, 남자는 기어오는 토마스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다우드를 바라보고, 토마스를 바라본다. 그 시선은 불안정하게, 암살자와 그의 제자를 번갈아 오갔다. 자신의 빨간 옷이 더욱 빨간 빛으로 물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다우드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옆구리를 뚫고 등으로 튀어나온 칼날에 정신이 어질거려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어째서 이런 감정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명령을 받들고, 자신을 보조하게 하는 부하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정이라는 것을 느낀 적도 없었다. 그는 빌리를 처형할 수도 있었지만, 그저 일시적인 변덕으로 그녀를 살려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토마스가 자신의 싸움에 끼어든 것에 분개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자신으로 끝내야 했다. 곧 있으면 고래잡이들이 돌아올 것이 뻔했다. 남자의 분노가 토마스에게로, 안토니오에게로, 마이크에게로, 다른 고래잡이에게로 옮겨가고, 수해지구는 어떤 인간도 살지 않는 구역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으로 끝내야 했다. 그들이 이런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했다. 16살 때, 배를 타고 던월에 밀항했을 때 이후로 누군가에게 정을 붙인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마녀인 어머니의 손을 놓은 뒤로 이럴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피투성이인 손을 더듬어서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에 빨간 얼룩이 남았다.

"제발, 코르보...!"

남자의 눈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자신을 죽이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하면서도, 다우드는 그에게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남자는 다가오는 토마스를 발로 거칠게 걷어찼고, 그대로 다우드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힌 감각에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는 넘어간 고개 앞에 마주해 있는 여제의 동상을 보았다. 제위한지 얼마 안되었을 무렵, 아직 소녀의 티도 채 못 벗은 재스민 칼드윈은 누구보다도 장엄하고 위풍당당한 자태로 수해지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텅 빈 눈동자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황제 재스민 칼드윈. 내 잘못을 인정하겠소.'

남자는 바닥에 누운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검을 양손으로 쥔 뒤,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래, 한 방에 끝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다우드는 그 검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검을 내리찍는 순간, 아마도 토마스는 울부짖을 것이다. 제발 죽지 말아달라고 소리지르면서 자신에게로 달려들겠지. 새빨간 피로 물드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채로, 그에게 온기가 돌아오기를 고대하면서 방관자에게 기도할 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방관자는 흥미를 잃은 인간에게는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 무책임한 존재였으니까. 그는 고래잡이들이 자신의 부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자기기만인 듯 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이들과 살아가고, 보이지 않는 정을 쌓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바로 남자의 뒤에 떠 있는 탓에, 그는 남자의 표정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남자는 그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고, 다우드는 눈을 감았다.

*

코르보! 꿈에서도, 현실 속에서도, 그의 이름을 언제나 애타게 외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있었다. 죽어가는 그의 몸을 채찍질하고, 잠든 그의 정신에게 박차를 가하고, 요새에 숨어든 그의 의식을 몰입시키는 비명소리였다. 자신의 딸아이를 끌어안고 지키려고 버둥거리고, 검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공포를 드러내면서 죽어갔을 때, 그는 철저하게 무력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었는데도, 그는 어느것 하나 놓지 못했다. 모든 것은 그의 책임이었고,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천천히 내리찍은 검에서 손을 뗐다.

"......코르보?"

그리고 그 여자를 죽인 자는 자신을 의아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얻어터진 나머지 여기저기 찢어지고 부은 그의 얼굴은 의아하다 못해 황당해하는 기색으로 가득했다. 그의 검은 다우드의 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포석을 쪼갠 채로 땅바닥에 꽂혀 있었다. 코르보는 손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우드의 멱살을 잡고 다시 억지로 일으켜 앉혔다. 다우드가 끙, 하는 신음소리를 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출혈로 떨리기 시작한 몸을 간신히 진정시키면서, 다우드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충만했던, 적개심과 증오, 복수심이 빠져 있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너 하나로, 끝내 달라고?"

한 십년 간 계속된 악연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이처럼 익숙한 상대였는데, 다우드는 그제서야 코르보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의 눈과 달리, 약간 쉰 목소리에는 온통 핏발과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 토마스조차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코르보."

신기하다. 이토록 질기고 지저분한 악연으로 맺어져 있었건만, 그는 저 남자와 말 한번 나눌 기회도 없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두 이방인은 각자의 목소리를 처음 들을 수 있었다. 다우드는 그 나지막하고 낮은 목소리 밑에 깔린 심연을 본다. 심연에는 20여년 간의, 아니 30여년 간의 묵을 대로 묵은 괴물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괴물은 성대조차도 말라 비틀어져, 마디마디 끊어가면서 말해야 했다.

"왜 나한테는 그 기회를 주지 않았지?"

기회. 그래, 다우드는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를 죽이지 마. 아이를 데려가지 마. 차라리 나를 죽여. 나로 끝내. 다른 사람들을 건드리지 마. 처음에 그는 그것이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냥감 하나를 끝낸다면, 나머지는 대섭정이 알아서 마무리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쌀 한 자루 속에서, 쌀 한 톨을 꺼내간 것처럼 세상은 멀쩡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그는 고래잡이들과 그저 주종관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과 생필품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이었고, 자신이 죽는다면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길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이 세계의 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다우드는 대답할 수 없었다. 깨진 가면 틈으로 보이는 매서운 눈은 다우드에게 대답을 요구함과 동시에 그 입을 꽁꽁 꿰매놓았다. 방관자가 사랑해 마지않는 필사적이고 절박한 인간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거무죽죽한 그것은, 사람의 심장이었다. 나사와 태엽, 작은 렌즈가 달린 기형의 심장은 다우드의 희미해져가는 정신에 퍼뜩 물을 끼얹었다. 그는 왠지 그 심장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이교도들은 방관자의 부름을 듣기 위해, 산제물을 죽이고, 그 심장을 제단에 바쳤다. 그 심장에는 이교도들의 염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강한 힘을 달라는 염원, 소중한 이를 돌려달라는 염원, 평화를 되찾아달라는 염원......

"과분한 놈이군."

마지막까지도 코르보와 그의 대화는 끊어져 있었다. 무엇인가를 대답해야 했는데, 다우드는 그 기회를 모조리 놓쳐버렸다. 그는 숨을 간신히 쉬고, 코르보의 말을 듣는 것 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코르보는 아주 작게 한 마디를 속삭였고, 거칠게 손을 놓았다. 다우드는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아직 대낮인데 이상하게 그의 시야는 무척이나 어두워졌다. 그 어두워져 가는 시야 속에, 긴 검은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다. 그 그림자는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옆에 꽂힌 검을 뽑았고, 다우드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대로 남자는 그에게서 떠났다. 두 번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미안하다, 코르보. 정말로 미안해."

그의 말을 코르보가 들었는지는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가물가물해져 가는 다우드의 귓가에서는 누군가의 환희에 찬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대로 다우드는 정신을 잃었고, 세상은 온통 밤이 되었다.

그는 오랜만에 서코노스의 바닷가에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뒤에서 그의 어머니가 따라오고 있었다.

*

무엇인가를 부산하게 찢고, 꽉 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찍, 찍, 하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에 다우드의 의식은 다소나마 뚜렷해졌다.

"......토마스냐?"
"다우드 님."

깊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다우드는 눈을 맥없이 껌벅였고,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해가 제법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니, 머지않아 하늘이 붉게 물들 것 같았다. 정신이 돌아오니 아픔도 덩달아 강해져서 다우드는 저도 모르게 끙,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상처를 열심히 손보고 있던 토마스는 그 소리에 손을 늦췄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두 시간 정도입니다."
"벌써 그렇게나......멍청한 녀석. 내가 명령을 했는데도 기어코 따라와서 일을 그르치는구나."

토마스는 작게 웃었다.

"더 늦기 전에 손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일 따름입니다. 처벌은 나중에 달게 받겠습니다."
"됐다."

빈혈 탓에 누워있는데도 현기증이 일었다. 토마스는 그를 일으키더니, 양 팔로 그를 들어올렸다.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이 편이 상처에 무리가 가지 않을 것 같으니 참아주십시오."
"멍청한 놈, 그러다가 한쪽 팔을 못쓰게 될 테니 당장 내려놔!"
"어차피 마법을 사용할 겁니다."
"그래라......코르보, 그 놈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론가 가겠죠. 당장에라도 쫓아가서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습니다만."
"아니, 그건 허락할 수 없으니까 포기해라."

다우드는 알 수 없는 허무감에 휩싸였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10년은 더 늙어버린 듯 했다. 이제 남자는 자신이 따라잡을 수 없는 곳까지 가 있을테고, 자신이 막을 수 없는 행동을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를 자랑스럽게 하던 마법도 이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이 흉물은 무엇입니까?" 그런 다우드의 상념은 토마스가 내민 심장과 함께 깨졌다.
"심장......"

다우드는 여제의 심장을 천천히 만졌다. 자신이 멈추게 한 심장이 그녀을 구하려 한 남자의 손을 거쳐,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기분이었다. 코르보는 그것을 원수인 자신에게 두고 갈 위인이 아니었다. 만약에 이것을 자신에게 두고 간다면, 이유는 두 가지뿐이었다. 이 기계심장이 더 이상 남자를 위안할 수 없게 되었다거나, 기계심장을 차마 자신이 갈 곳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거나.

“......언젠가 같은 땅에서 비슷한 삶을 흘려 보내왔던 두 이방인들이 있었지."

다우드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우린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고 머나먼 타국의 땅 위에서야 비로소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 조금이라도 일찍, 조금이라도 더 평안한 시기에 만났더라면 우리 둘은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망상이지만 말야. 그 시기에 만났다면 우리는 서로를 통해서 고향을 향한 향수, 이방인들만이 으레 공유하는 동질감을 공유할 수 있었겠지. 그렇지만 우린 서로를 향한 원망과 후회만을 찾아냈지. 우리 둘은 다른 이들이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각자의 눈으로부터 세월에 마모되다 못해 메울 수 없는 앙상한 구멍만 확인했을 뿐이야.”
"......아까, 남자가 무어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습니다. 전 듣지 못했지만 말이죠. 그것 역시 그러한 말이었습니까?"
“귀도 참 좋은 녀석이야. 하하하......’왜 그 순간에는, 그 때는, 지금처럼 망설이지 않았던 거냐고, 왜 아무것도 자신에게 묻지 않았냐’고 말하더군. 그 말을 했을 뿐이었어. 내 비겁함을 정말이지 가감없이 비웃더군. 말없는 자였지만 말이 없다고 해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 그저 그걸 사람들에게 웅변으로 호소할 줄 몰랐을 뿐이고, 행동으로 보여줬던 거야.”
"다우드 님."
"뭐냐?"
"당분간 그리스톨을 떠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떠날 거다. 서코노스든, 티비아든, 몰리든, 아무 곳이든 상관 없어. 몸을 대충 추스르는 대로 제국을 떠날 거다. 고래잡이도 해산할 거야. 빌리 녀석......나를 배신하고 도망가는 처지였으면서도 다른 세상을 여행해 보라고 조언을 남겼더구나. 내가 저지른 죄가 많고, 비겁한 짓이지만 그래도 딱 한 번만이라도 살면서 그 죄를 조금씩 갚을 수 있다면......마땅히 그 길을 가야지."
"배편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이제 던월은 끝나겠죠.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더 죽어나갈 테고."

다우드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피곤했지만, 한 마디만 더 하고 싶었다.

"그래? 과연 그럴까? 토마스, 나는 한 때 사람이나 세상이나 달라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어. 한번 형태가 굳어져 버리면 영원히 그 모습으로 적당한 타협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까 전에야 깨달은 거지만......그건 틀린 생각이었어. 나조차도 원래의 나라고 생각했던 모습에서 달라져 있었지. 제국은 이대로 종말을 맞을 수도 있어. 아마도 되살아나는 것보다는 그 쪽의 확률이 더 높을 테지. 그래도 나는 한 가닥의 희망이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내가 너희들과 지내면서 아주 약간 달라진 것처럼......내가 참회하는 심정에서 구했던 그 소녀가 남자의 발길이 잘못된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기를 바라고 있어. 이 세상이 내가 틀어놓은 대로 이루어지기는 절대로 바라지 않아. 만약에 그 소녀와 남자가 어떻게든 물꼬를 틀어놓고, 세상이 다시 이전의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는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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