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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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도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마치 누가 미리 신호라도 보낸 것처럼 서로를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상대방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표정도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에 흉한 상처자국이 난 중년의 남자은 전에 없이 생기가 넘쳐보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몹시 초조해 보였다. 한편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얼굴은 기이한 해골 형태의 가면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어 표정을 알 길이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약간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보건대, 그 역시 다소 초조한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거리를 좁히는 것 외에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질퍽거리는 발 밑 웅덩이에서 지저분한 물이 튀어 두 사람의 부츠와 바짓가랑이를 적셨다. 중년의 남자는 천천히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다우드 님……”
던월의 검, 고래잡이의 지도자, 던월 으뜸가는 살인마. 그에게는 여러 이명이 달라붙어 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이름은 다우드였고, 그와 가까운 자들 역시 그를 이명 대신 '다우드'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다우드는 자신의 발걸음 가는 데마다 점점이 찍힌 웅덩이를 본다. 시커먼 웅덩이에는 말간 하늘이 그대로 묻어 있었고, 그는 그 광경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1년 13달 중 반 이상이 우중충한 던월답지 않게 청명하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초록빛으로 썩어가는 저 건물 밑 물들과 그 안에서 고요히 썩어가는 시체들만 아니었다면 소풍이라도 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우드는 소풍과는 인연이 먼 남자였기에 저 밑이 죽은 물웅덩이가 아닌 꽃이 흐드러지게 핀 잔디밭이었더라도 소풍 가자는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소풍을 갈 여유가 없기도 했고, 그는 자신이 소풍을 간 적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아직 수염도 나지 않고 잔주름도 없던 꼬마 시절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소풍을 갔을지도 몰랐다. 한 손에는 짭짤한 절인 육포, 신선한 포도 몇 송이, 그리고 너무 오래 구워 퍼석퍼석해진 과자를 담은 보퉁이를 들고서 무더운 햇살을 뚫고 지나가던 그 시절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는 그 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것인지, 불결한 던월의 골목 풍경 위를 덧칠하려고 시도했던 헛된 망상이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기억은 눈앞의 현실만 아니었어도 이 초로의 암살자에게는 참 좋은 안주거리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꿈이 찬란하다 한들 그가 몸 담그고 있었던 것은 현실이요, 현실이란 저 늪보다 더 지저분한 데다가 빠져 나오리라는 요행조차 바라기 힘든 곳이니, 그 진위조차도 불분명한 추억으로 억지로 세상을 미화하여 바라볼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행했던 것은 옆사람을 닥치는 대로 물속에 밀어 넣은 다음 그 몸뚱아리를 딛고 올라서서, 잠시 숨을 돌리는 것 정도였다. 비록 그가 그런 악행에 쾌감을 느끼는 변태적인 인간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자기의 발판이 된 이에게 다시 손을 내밀 엄두조차도 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올라타고, 올라타고, 또 올라타기를 반복하며 뿌려진 그의 업을 거두어들이기는커녕 그저 자기 앞길을 나아가는 데에 급급했다. 무책임한 변명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정말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쌓아놓은 업들은 대부분 골목 어디론가에 소리소문 없이 묻혀 버렸지만, 어떤 것은 끝끝내 진창을 헤친 뒤 다우드의 앞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복수의 열매까지 큼지막하게 맺어서 돌아왔으니 씨앗을 뿌린 입장에서는 대견하기 그지없었다. 열매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다우드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릴 뻔 했다.
‘열매는 열매지. 전혀 먹음직해 보이지도 않고, 위험하고 독하기 이를 데 없는 열매.’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나른하게 익어가는 열매들과는 사뭇 달랐지만, 해골가면 역시 그가 뿌린 씨앗에서 난 열매 같은 자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던가, 자신의 업보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서 제 발로 자신에게 돌아온 사람은. 차가운 바닷물 속 부대자루에서 끄집어냈을 때, 저 흉측한 가면 아래의 얼굴은 죽은 자 특유의 피폐하고 앙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표정은 죽은 자에게 익숙해진 다우드를 몹시도 괴롭혔다. 처음에는 ‘그 사건’은 개인적인 비즈니스라고 생각했고, 조약돌을 연못에 던진 만큼의 여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국에게 있어 ‘그 사건’은 그 기반을 뿌리째 뒤흔드는 수준의 대참극이었다. 그래도 제국은 끈질기게 매달려서 그 장대했던 역사를 어떻게든 이어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사건’이 다우드 자신과 제국에게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으나 어찌됐건 그들은 아직 아슬아슬하게 버티고는 있었다. 그렇다면 그 남자에게 있어 ‘그 사건’은 어떤 의미였을까?
공허한 유리눈알 너머로 서슬 퍼런 안광이 번뜩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햇빛에 눈이 부신 나머지 헛것을 본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그 환각을 신호로 여겼고, 상대방 역시 한순간 달라진 적의 눈빛을 신호로 포착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진다. 그들을 비추던 햇빛은 분필자국처럼 허공에 굳어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던 새소리는 어설픈 잔향만 남긴 채 굳어버렸다. 물러날 자리라고는 없는 이 제국의 한가운데, 아무도 알지 못할 외로운 수해지구 어딘가에서, 두 남자는 오로지 각자의 힘만을 믿은 채 격돌했다.
*
익숙해진다는 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빵을 굽는다거나, 고기를 빨리 썬다거나 하는 기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내 동료들이 빵공장과 고기공장에서 일하면서 자신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헷갈렸다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토로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것도 힘든 일이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삶의 일부에 대한 적응이 아닌, 삶 그 자체에 익숙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내가 자란 곳에서 익숙함이란 곧 방치, 방기를 의미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당신들과 나의 피부의 혈관을 한올한올 쥐어뜯는 듯한 불행과 슬픔은 일상이 된다. 공포에 길들여진 나머지 공포에 무감각해진다. 제 삶에 무기력해진 이들은 그나마 덜 쥐어뜯길 장소에 주저앉아, 저들에게 남은 시간이 조금씩 감해지는 것을 멍하니 앉아 지켜보기만 한다. 끔찍한 일이다. 파상풍 걸린 제 손이 썩어가고, 살갗을 좀먹는 곰팡이병, 발가락을 갉아먹는 쥐에도 익숙해져 죽음만을 기다릴 정도의 삶이란 정말로 끔찍하다. 심한 사람들은 한탄조차도 하지 못했고, 이들이 가끔 내뱉는 말들은 사실 ‘말’이라기보다는 개구리 다리를 전기로 지질 때의 반사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간신히 숨이 붙어 있어서 수렁에서 간신히 머리를 내밀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손을 꺼내 무언가 잡으려고 했다가는 머리마저 가라앉아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렸고, 결국 오도가도 못한 채로 머리만 물 위에 동동 띄워놓은 형국이었다. 헐벗은 부랑아를 거둬들인 자애 넘치는 자선가, 인심 후한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는 그저 공상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마스터는 그런 나의 뒷덜미를 잡아다가 단숨에 뭍으로 끌어올려놓았다. 물 속에서 무기력하게 떠 있는 감각에 익숙해진 나머지 뭍에 있다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때에는 정말로 그랬다. 내가 뭍에서 태어나 뭍에서 자라고, 뭍에서 숨을 거두어 묻히게 되리라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거짓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 분이 무슨 이유에서 나를 구했는지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10년쯤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 시절의 무기력감으로 인해 때때로 나는 그 분이 왜 나를 구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다. 우리가 사냥하는 자들이 우리를 인간 도살자라느니, 저질스러운 살인마 집단이라느니 하든 간에, 천천히 시들어가는 무기력감보다는 난폭한 활력 쪽이 백 배는 의미있는 것이었다. 사흘 연속으로 굶어보거나 이유없는 학대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광폭한 활력이야말로, 내가 다우드 님을 따르고 그 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수하기로 결의한 이유였다. 한편 내게는 일말의 불안이 남아 있었다. 6개월 전 그 테라스에서 죽은 여제의 시신을 넋놓고 바라보던 호국경을 본 이후로, 그 불길한 예감이 가실 날이 없었다. 비록 형무소에 끌려가서 죽을 것이 확정된 처지라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자는 언제라도 감옥 문을 박차고 뛰쳐나와 마스터를 벼랑 밑으로 집어 던질 것만 같았다. 결과적으로 내 예감은 거의 맞아들었다. 그렇지만 그 호국경이라는 자가 바다에서 되살아나와 마스터의 목을 부러뜨리려고 했던 것만은 정말로 예상 외의 일이었다. 내가 그 자의 뒤통수를 후려쳐 기절시킬 때까지 마스터는 여전히 냉정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분 역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제의 딸을 구하고, 사악한 마녀를 죽는 것보다도 못할 비참한 꼴로 만들어 놓았던 것은 확실히 마스터의 방식이 아니었다. 되살아난 망자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리는 대신 그저 감옥에 감금해두라는 것 역시 그 분의 방식이 아니었다. 마스터가 달라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곧 내 두 번째 세계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빌리의 말이 옳았던 것일 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처럼 배신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마스터가 나보다는 훌륭하지만 실수를 하고, 오판을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점 역시 인정해야 했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그 분을 믿지 못하고, 나 자신을 과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면 명색이 ‘부관’인 내가 그 오점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 그래서 나는 마스터를 지키기 위해 그 분의 명을 어기기로 결심했다. 명이라고 해봐야 별 건 없었다. 그저 수해지구 입구 부근에서 망을 보면서, 또 다가올 지 모를 주시자들의 습격에 대비하라. 이것이 전부였다. 그 분은 감옥에 갇힌 저 남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나는 저 산송장이 무언가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홀로 수해지구에 남아 일대를 몰래 망보았고, 등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정신을 잃었던 것이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해로운 것이라고, 아무리 몸에 익은 일이라도 언제나 낯설게 대해야 한다고 나는 무수하게 되새겨왔다. 이는 몹시 피곤한 버릇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무척 잘된 일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내가 고래잡이로서의 임무에 지나치게 익숙해지고 그 과정에서 입는 부상의 통증에 익숙해졌다면, 탈구된 어깨의 고통에도 잠들어있었을 것이고, 저 남자가 다우드 님에게 칼 끝을 향하는 것을 목도하지 못했을 테니까.
*
재미있는 칼이었다. 한 뼘 정도 되는 손잡이가 손 안에서 돌아가면 한번, 두 번하고 그 안에 숨어 있었던 칼날이 머리를 빼꼼 내민다. 주인이 필요로 할 때까지는 평범한 금속 덩어리의 껍질을 뒤집어쓴 채, 기회를 엿보면 그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어 사냥감을 주저 없이 찍는다. 실로 신분을 숨기는 것이 일상인 암살자를 위한 검이었다. 마음에 드는 검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으로 쇄도하는 그 검을 맞아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서로의 검이 부딪힌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음이 챙, 하고 사방으로 퍼졌다. 다우드는 비록 제 자신이 예전처럼 날렵하고 강인하지는 못하나, 그래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저 남자의 검격을 받아낼 정도로 힘이 셌고, 그 검격을 튕겨내기야 무섭게 비스듬하게 베어오는 빛을 피할 정도로 날쌨다. 이렇게 막상막하인 전면전은 실로 오랜만이었고, 단 한 순간의 오판도 목이 날아갈 정도로 치명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강했다. 두 사람은 가차없이 싸웠고, 한 번의 공격으로도 상대방을 두 조각 내버릴 기세로 서로를 공격했다. 그 검격에 온 힘을 쏟아 부은 나머지, 자신들이 다른 무기를 사용할 수 있음을 잊어버릴 정도로.
이윽고 다우드가 아닌 가면을 쓴 남자 쪽이 그 팽팽한 균형을 깨트리는 첫 포성을 끊었다. 남자는 다우드보다 젊었고, 힘 또한 그보다 약간 강했다. 가까이 맞붙어 있었던 검이 다우드 쪽으로 기울면서, 그는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 비틀거리는 그의 발걸음을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남자는 단번에 그 간격을 좁히면서 덤벼들면서 한번, 두 번, 세 번 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우드가 검을 피했을 때, 남자의 빈 손에는 다우드의 미간을 노리는 총이 쥐여져 있었다. 발 밑 포석소리가 소란스러운데도 찰칵 하는 소리만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다우드는 그를 집어삼키려는 시커먼 총구를 보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우드는 희미하게 웃었고,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겼다.
누군가가 고무줄을 길게 잡아당긴 것처럼 그 짧디 짧은 찰나는 한없이 길게 늘어났다. 그 시작과 끝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길쭉해진 순간의 한가운데에서 총 끝에서 피어난 폭발음 또한 우스꽝스럽게 늘어지고 있었다. 총알은 0초와 1초의 틈바구니에 끼어 애처롭게 허공에 떠 있었다. 다우드는 총알을 머리 위에 두고 피하면서, 남자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이번에 균형을 잃은 것은 남자 쪽이었다. 아주 희미한 비틀거림이었지만, 다우드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가슴을 향해 내찌르는 검을 남자는 아슬아슬하게 피했고, 이번에는 칼자루 끝으로 손목을 호되게 강타당했다. 고래 도살용으로 만든 검인지라 폼멜이 달려 있지는 않았지만 그 충격은 생각보다 강했다. 얼얼한 손목에 힘주어 검을 쥔 남자가 고개를 든 순간, 그 눈에는 화살 여러 발의 빛이 들어왔고 이와 동시에 늘어난 시간이 다시 원래의 형태로 압축되었다.
“!”
남자가 반사적으로 화살 두어 개를 검으로 막아낸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반사신경이 없었더라면 기적이나 신의 가호라도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발은 남자의 가면의 특히 두꺼운 금속판에 맞고 튕겨나갔다. 어차피 위력보다는 소음에 최적화되게 만들어진 화살이었기에 다우드는 애초부터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화살을 맞고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들어간 남자 쪽이 훨씬 놀라웠다. 튕겨나간 화살이 바닥이 떨어지기도 직전에 남자는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남자가 있던 자리에 화살과 함께 동그란 금속이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다우드는 남자가 왜 반격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다우드가 십여 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기야 무섭게, 수류탄이 폭발하며 주변의 벽돌이며 판자, 먼지를 저만치로 쓸어버렸다.
“괜히 호국경이 된 게 아니었군.”
자신들의 화살이 가면을 뚫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 교란작전을 위해서 눈알 하나쯤은 희생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다우드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전 호국경은 전투에 한해서는 무서운 감각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젊을 때부터 힘 쓰는 일만 했으니, 의회의 권모술수나 인간이 생각보다 더럽다는 걸 배울 시기도 놓쳤겠지.’
어제 자신이 한 말이 떠올라 다우드는 쓰게 웃었다.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서툴 지 몰라도, 저 자는 타고난 전사였다. 그는 잽싸게 앞으로 몸을 날리자 그가 있던 자리에 석궁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화살에 달려 있던 폭약이 터지면서 나무 창틀에 작은 불이 옮겨 붙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자, 검은 그림자가 지붕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6개월 전에는 그의 밑에 주저앉아 있었던 남자가, 이제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다우드는 고함지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대단하군, 코르보! 제법이야!”
이제 다우드는 지붕 위에 올라서서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 석궁을 집어넣은 말없는 남자는 다우드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여전히 욱신대는 손을 쥐었다 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우드는 그 모습에서 까닭 없이 기시감을 느꼈다. 중심축을 잃은 팽이마냥 맥없이 서 있는 꼴이, 지금이라도 총을 쏜다면 그대로 맞을 듯싶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목을 치려고 기세등등한 산짐승은 온데간데 없고,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넋 놓은 허수아비인 것처럼 보였다. 다우드는 갑작스러운 그 모습에 황당함마저 느껴 화살을 쏠 생각조차 잃었다. 혼이 빠진 그 모습에 다우드는,
죄책감을 느끼는가?
밤하늘을 점점이 수놓은 별과 투명빛 푸른 바다, 허름하지만 양지바른 안식처, 이 모든 평온한 순간들이 하늘로 가라앉는 것마냥 허무해질 때가 오곤 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이야말로 바로 그 때였다. 탁한 허공 속, 세월 속으로 빗겨나간 그의 악몽과 추억들이 혼재하는 곳, 모두가 갈 수 있지만 아무도 모를 그 장소를 지배하는 자이자 이 세계를 지켜보는 광대 같은 신. 그에게 말을 건 것은 그 신이 며칠 전 자신에게 건넨 목소리의 잔향이었다. 다우드는 뒤죽박죽이 된 귀를 막고 싶어졌다.
답을 ‘직접 말하기를’ 원하나, 방관자여? 우리 속에서 쥐새끼들이 노니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먹이를 던져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 쥐들에게 갇혀서 길들여지는 기분마저 어떤지 이실직고하기라도 원하나?
“과연 호국경이야. 비꼬는게 아니야. 정말이지 한 순간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군그래. 아니지, 빈틈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야. 너와 겨룬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선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는지 모르겠어.”
남자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여전히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다우드는 상대방이 제 말을 들었거나 말았거나, 그저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과거와 현재를 오갔고, 아귀에 맞지 않는 말조차도 입에 올리고 싶어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 속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 목소리, 모든 것을 아는 주제에 뻔뻔스럽게도 고해자의 입이 직접 고해성사를 행하길 바라는 그 과거의 목소리가 다시 그를 괴롭히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미 예전부터 이랬어야 했지. 그래……어떤 방해꾼도 끼어들어서는 안되었어. 나를 사주한 것은 그 여우 같은 섭정 놈이라지만, 결국 손에 직접 피를 묻힌 것은 바로 나였지. 한참 전에, 6개월 전에 이미 너와 나는 검을 겨루었어야 했어. 그랬다면 사태가 이렇게 꼬이지도 않았을 테고, 던월은 어떤 방식으로든 안정을 되찾았겠지. 그리고 너든 나든, 누군가가 그 여우 놈의 목에 칼을 박아놓던가 했을 거야. 그 돈이나 명예라는 게 정말로 뭔지 모르겠어. 나를 지상에서 6개월 동안 벌벌 떨게 하고, 너를 6개월 동안 벌벌 떨게 한 그 놈의 금인지 충성인지가 도대체 뭐길래 우리를 여기까지 몰아넣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야. 지금 이 제국이 정말이지 신나게 끝으로 치닫는 것은 억만금과 수억 미물들의 충성심을 모아도 막을 수 없겠지. 분명히 시작은 딱 한번의 칼질이었는데 말야. 그 정자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 한 여자를 죽……”
다우드의 말은 툭 끊어졌다. 마지막 한 마디를 끝내기도 전에 남자는 호랑이처럼 사납게 덤벼들었고, 그는 잽싸게 남자의 검을 받아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매섭고 억센 힘이 실려 있어서 저도 모르게 몸이 뒤로 밀려나는 듯 했다. 그가 간신히 남자의 공격을 걷어내기야 무섭게 남자는 몸을 낮추고, 배를 향해 날카로운 찌르기를 가했다. 옆으로 몸을 젖히자마자 그 날 끝이 보호복 끝을 살짝 가르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헛칼질을 한 남자는 어깨로 다우드를 들이받았다. 검에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들이받기에 큰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요행이었다.
“다우드 님!”
저만치에서 싸움을 구경하던 토마스의 애타는 외침이 들려왔다. 걱정 마라, 토마스. 너보다는 늙었지만 아직 멀쩡하게 싸우고 있지 않느냐. 그나저나 너도 참 고집불통인 녀석이구나. 조용히 둘 만이서 시간을 보내려고 그토록 누누이 말했는데, 너는 그 빈틈조차도 걱정스러워서 기어코 명령을 어기고 말았어. 너를 오랫동안 알고 있었으니 걱정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녀석이 기절한 너를 끌고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나마 저 자가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다우드 님, 왼쪽!”
알아, 이 녀석아. 그 생각을 흘려 보내면서 남자의 발차기를 피한다.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세찬 바람만이 남았다. 그로서는 남자의 행동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복수심과 증오로 이글이글 타오르던 저 모습이, 방금 전에는 혼 빠진 인형마냥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자신의 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다우드는 남자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고, 검로 그 어깨를 노렸다. 남자는 팔을 꺾으면서 검을 받아쳤다. 남자의 힘과 자신의 힘을 받아내고도 멀쩡하다니, 저 검은 정말로 실력있는 장인이 만든 것임에 틀림없었다. 저런 검은 접히는 부분의 내구력이 약하기 마련인데 용케 그것을 버티고 있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남자의 장비들을 탐내던 고래잡이들을 떠올렸고, 또 자신이 제국의 과학원에서 마법이며 신화며 이교의 성지를 공부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과학원은 온갖 천재들과 수재들로 득시글거렸고, 그들의 괴이한 청사진과 위험하기 그지없는 발명품으로 소란이 멎을 날이 없었다. 개중에는 자신들의 과학 이론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바로 지금의 다우드와 이 남자처럼 결투를 벌이는 멍청이들도 있었다. 머리는 꽉 찼는데 심장은 텅 빈 얼간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 어쩌면 이 검을 비롯한 남자의 장비들은 그런 똑똑한 얼간이들이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고집어린 천재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라면 제국의 '반역자'에게 기꺼이 협력할 그런 얼간이가. 남자의 권총에서 발사되는 총알을 간신히 피하기야 무섭게 두번째 총알이 다시 발사되었다. 다우드는 다시 시간을 정지시켰고, 총알은 그의 가슴에 닿을락말락한 위치에 정지해 있었다. 아마 그 발명가는 틀림없이 모험심이 넘치는 데다가, 다른 과학자들과 이론을 공유하려는 생각따윈 하지도 않는 고집불통이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군인들도 쓰지 않는 연발식 권총을 발명할 리가 있나. 괴짜들이 넘쳐나는 과학원 내에서도 우두머리 격으로 치면 으뜸갔던 소콜로프가 떠올랐다.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다우드는 남자를 몰아세웠다. 각자의 검이 부딪히고, 팽팽한 접전을 다시 벌이기도 전에, 다우드는 몸과 검을 비스듬히 빼면서 남자의 검격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매섭게 남자의 어깨를 그었다.
"제법이야!"
기대하던 살갗을 가르는 느낌은 오지 않았다. 대신 남자의 검은 옷깃과 금색 단추만이 허공에서 선을 그리면서 떨어졌다. 실망에 혀를 찰 틈도 주지 않고, 남자는 한 걸음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우드의 팔은 아직 쭉 뻗은 채로 허공을 긋고 있었고, 남자는 자신의 검보다 더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남자의 억센 손아귀는 그의 무방비한 팔을 움켜잡았다.
"!"
그대로 세상이 뒤집히면서 다우드는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나마 메쳐지는 와중에도 민첩하게 낙법을 취한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겠지만, 깨진 포석이 한가득한 바닥에 등부터 떨어지니 죽을 맛이었다. 그는 남자가 자신의 팔을 부러트리기 전에 발로 가슴을 걷어찼다. 비틀대는 남자의 손힘이 풀린 틈을 타 다우드는 간신히 일어나 순식간에 그와의 거리를 몇 미터 벌렸고, 남자는 이에 질새라 즉시 그 거리를 좁혔다. 꺾인 오른팔이 얼얼하니 검으로 그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은 잠시 피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남자의 접이식 검이 다우드의 어깨를 찌르는 것보다, 다우드의 왼손이 남자에게 향하는 것이 약간 더 빨랐다. 그 손이 향하기야 무섭게 남자는 허공으로 떠올랐고, 다우드는 거칠게 남자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균형을 잃은 남자는 발을 헛디뎠고, 그대로 한 층 아래로 추락했다. 온갖 집기더미가 쌓여 있는 침대 위로 떨어지자 지저분한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남자의 총은 한참 떨어진 곳으로 굴러갔다. 먼지구름 사이로 튀어나온 다리 두 짝을 바라보며 다우드는 얼얼한 오른팔에 힘을 주어보았다. 단 일 초라도 주저했다면 그대로 어깨뼈가 관절에서 떨어져나가거나 잡힌 부분이 뚝 부러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초조한 침묵을 지키고 있으려니, 어김없이 낯익은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다우드, 나의 친구.
숨을 고르는 다우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실웃음이 튀어나왔다. 친구라, 뻔뻔스럽기도 하지. 저 징글맞은 초월자가 과거에 이른 것과 달리 그에게 친구는 없었다. 한때 동경하고 연모했으며, 지금은 떠올리는 것 만으로 혐오하고 꺼림칙한 맛만 남기는 방관자의 일방적인 호칭일 따름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심장 속 불씨를 부추기는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자신의 명을 받들어 어떠한 더러운 행위라도 서슴치 않는 부하들 역시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다. 살갑게 굴면서도 주머니를 돈으로 두둑하게 채워주는 순간 뒤돌아보는 이들 또한 친구라고 할 수 없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오로지 부하와 적대자, 일시적 협력자와 의뢰인......그 정도 뿐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 밑에서 남자가 비틀거리면서 잡동사니 더미를 헤치고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탓에 까만 옷은 허옇게 더러워져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한 쌍의 렌즈는 여전히 음습한 독기를 머금고 다우드를 직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는 그의 앞에 나타나 둘 사이의 간격을 다시 좁혔다. 꽤 아팠을텐데도 움직임에는 막힘이 없었다. 수해지구는 여전히 정적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해골가면 사이로 후우, 하는 숨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코르보, 내가 밉나?”
남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긴 손가락이 렌즈에 내려앉은 먼지를 슥 훑어낸다. 다우드는 그의 손톱 군데군데가 상해있음을 보았다.
"당연히 밉겠지. 당장 목을 따고 싶을 정도로."
답변은 돌아오지 않는다. 제대로 된 답변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빈정거림이나 욕 한마디조차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의외였다. 저 자는 원래부터 저렇게 과묵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은 상상한 적 없는 방법으로 죽음을 맞은 순간, 절대적인 초월자가 그에게서 생기와 함께 목소리도 앗아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 광경에 그는 우는 자들을 떠올렸다. 예전에 견습 수준이었던 젊은 고래잡이가 있었다. 시내의 격리지구에 잠시 임무를 다녀온 그 젊은이는 그의 옷깃에 남몰래 묻어 온 역병에 시달렸고, 며칠을 앓던 끝에 목숨을 거두었다. 모두들 그의 고통스러운 투병과 죽음을 슬퍼했지만, 그들 역시 역병의 입김에 한없이 무기력했기에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것은 먹을 것을 격리된 방에 밀어 넣어주는 것뿐이었다. 초월자의 권능 덕인지, 운 좋게 면역이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우드는 역병에 걸리지 않았기에 그 고래잡이의 죽음을 유일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우는 자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흐느끼던 그 고래잡이는 다행히 멀쩡한 사람인 채로 죽었다. 화환 대신 장작에 둘러싸여 불타는 그 시체를 보면서 다우드는 자신이 목격한 우는 자들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귀환을 그리면서, 버려진 집 한가운데에서 피눈물 점점이 맺힌 기다림 속에 잠겨있는 그 비참한 자들을. 이상하게도 저 남자에게서 그 우는 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이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이들을 기다리는 그런 병자들의 모습, 병고와 혼미한 의식의 그늘에 깔린 가운데에서도 따뜻한 추억을 그리는 그런 병자들의 모습이. 그러나 그는 저 가면 밑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넌 정말로 끈질긴 놈이야. 콜드릿지를 탈주하고, 고위주시자에게 낙인을 찍고, 펜들턴 쌍둥이에 그 삼엄한 곳에 사는 보일 여사마저 납치했지. 게다가 여우 같은 섭정은 아예 죽여버리기까지 했어. 이건 좀 아쉽군. 내가 먼저 했어야 하는 일인데. 그렇지만 독한 독을 먹은 것도 모자라 머리에 구멍이 나고, 바다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도 아직도 두 발로 서 있다니......"
가면 밑에서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제국은 점점 침몰하고 있어, 코르보. 비웃어도 좋아. 이 꼴을 만들어낸 건 다름아닌 나지만, 정작 나란 인간은 그 불씨를 끄는 방법도, 어떻게 돌릴 방법도 알지 못하니 아주 기가 찰 노릇이지."
"......"
"그래서, 나를 쓰러트리면 어디로 갈 거지?"
"......"
"허,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건가? 아무렴 어떻겠어, 어쨌든 간에 이 싸움이 끝나면 한 사람만 남아 있을 테니, 굳이 대답을 할 필요도 없겠지. 만약 네가 살아남으면 원래 있었던 본거지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겠지. 그곳에서의 목적은 에밀리 칼드윈을 구출하거나, 아니면 너를 배신한 자들에 대한 복수 둘 중 하나일 테고. 아니면 둘 다이거나. 안 그런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나자, 이제 두 사람은 공터처럼 넓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해가 남자의 옷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넌 서코노스 출신이더군.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대강 짐작은 했지만 말야."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낮추고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어째서 그의 말을 듣고만 있는 건지, 어째서 아까 전처럼 매서운 공격을 퍼붓지 않는지 다우드는 알 수 없었다.
"기구하단 말야. 모처럼 같은 고향 출신과 얼굴을 맞대나 싶었는데, 설마 이렇게 싸움질을 하면서 죽고 죽이는 것으로 끝날 관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렇지만 그걸 이제 와서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어......평범한 관계로 만나기에는 우리는 서로 너무 먼 길을, 다른 길을 걸어 왔으니까. 결과적으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났지만 각자의 길을 거쳐오다 보니 우린 둘 다 너무 달라졌지."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감상에 젖어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선택할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버려온 무수한 선택권들이 있었다. 그 때에는 큰 후회와 미련도 없이 포기한 것들이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때의 선택들 하나하나가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이제 뼛속까지 암살자가 되어 있었고, 상대방은 철저한 군인이자 왕실의 수호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여제를 죽였고, 상대방은 여제를 죽인 자를 추격하는 복수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 상대방에게 무슨 낯짝으로 감성 어린 하소연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바로 이 자리에 서서 늙은이의 추억을 상대방이 이해해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오만이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어."
이에 대한 남자의 대답은 공격이었다.
*
빠진 어깨를 맞추는 것은 옛저녁에 포기했다. 어딘지 우울해 보였던 그 얼굴과 달리, 생각보다 남자는 철저한 데가 있었다. 설마 목을 죄서 날 기절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한쪽 팔을 빼 놓고 수면제까지 주입해 놓을 줄이야. 내 숨통을 끊어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외였지만, 어쨌거나 고래잡이들이 어느 정도의 약물에 익숙해지도록 훈련 받았다는 것을 간파한 듯한 모양새였다. 덕분에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지금도 세상이 핑핑 도는 느낌이어서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저 치열하기 이를 데 없는 전투, 내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과격한 결투에 부상자가 끼어들어봐야 다우드 님의 발목만 붙잡게 될 것이다. 다우드 님은 여지껏 고래잡이들 앞에서 보인 적 없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호국경이라는 자 또한 그 동안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상당한 피로가 쌓여 있었겠지만 거의 폭풍과 같은 기세로 다우드 님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들은 눈 깜짝할 새 벽이나 지붕 위로 이동했고, 한 치의 빈틈이라도 생길라치면 총이며 화살을 퍼붓곤 했다. 바로 코앞에서 발사된 총알도 방관자의 축복 어린 입김을 받은 둘 앞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바람처럼 투명하고, 번개만큼 빠르고, 벌보다 날카롭고, 석쇠처럼 불타오르고, 서리처럼 냉정침착한 이 결투는 거의 한 판의 격렬한 춤과도 같았다. 불구가 될 위험,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쓴 이 싸움을 '춤'이라고 표현하다니, 아무래도 나는 어지간히 이 적나라하고 무자비한 세계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부끄럽게도 나는 두 사람의 비등한 결투를 손에 땀에 쥐고 지켜보면서 약간의 황홀함마저 느꼈다.
그러나 서서히 전세가 우리 쪽이 아닌 저 자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기묘한 도취감에서 갑자기 깨어나게 되었다. 남자는 아까 추락한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마스터를 귀신같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반면에 마스터는 서서히 지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는 두 사람의 나이 차이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실력 차이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남자가 마스터보다 훨씬 더 필사적이고, 집요하고, 독을 품고 있으며, 그악스럽게 공격을 퍼붓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생명 따윈(저 자에게 생명이 남아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안중에 없다는 듯, 남자는 다우드 님의 맹렬한 공격 속으로 가감없이 덤벼들었다. 그러나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정작 그 움직임은 거의 대부분의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하고 있었다. 만일 내가 어설픈 객기를 부려 저 남자와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약간 몸서리가 처졌다.
다우드 님이 손목을 향해 검을 내찌른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비스듬히 피하고, 왼손으로 검을 쳐낸다. 버클이 칼날에 찢어진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는다. 두 사람의 거리가 더욱 좁혀진다. 남자는 어깨로 다우드 님을 들이받고, 왼손을 얼굴을 향해 들이댄다. 그러나 다우드 님은 남자의 뒤로 어느새 이동해 있다. 바람이 회반죽 벽을 산산조각 낸다. 남자는 옆으로 구른다. 빈 자리를 화살이 통과한다. 왼 손은 석궁을 꺼내서 화살을 발사한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이 흐르자마자 두 사람은 어느 틈에 위층으로 이동해 있고, 화살은 벽에 걸린 그림을 뚫는 데에 그친다. 두 사람의 검이 다시 부딪힌다. 이번에도 남자가 약간 더 우위에 있다. 힘으로 밀쳐내고, 다우드 님이 비틀거린다.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배를 폼멜로 찍는다. 다우드 님이 비틀거린다. 그러나 그 손을 붙잡고 비튼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회전시키면서 자신의 온 무게를 잡힌 손에 싣는다. 무게위로 이동하자마자 남자는 다시 아래층으로 이동한다. 다우드 님은 그 자리에 놓인 무언가를 보고, 황급히 아래층으로 뛰어내린다. 무언가가 터지면서 벽에 깊은 칼자국이 무수하게 생긴다. 다우드 님은 탁자 위로 착지하고, 탁자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마스터를 걷어찬다. 바닥에 굴러 떨어지면서, 다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발 밑의 판자 끄트머리를 힘껏 밟자, 다가오던 남자는 튀어나온 판자 반대쪽 팔꿈치를 호되게 맞는다. 다우드 님은 검을 휘두른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상처를 입었는지, 남자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움찔한다. 그러나 너무 얕다. 그 부상은 남자에게 큰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남자는 검으로 다우드 님의 뺨에 작은 상처를 냈다. 다우드 님이 뒤로 물러나자, 그는 다시 달려들었다. 발 밑의 판자가 두 사람의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쩍쩍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건물 일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두 사람은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각자의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다시 서로의 심장과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제 이들은 내 바로 근처에서 싸우고 있었다.
마스터는 나를 보면서 '끼어들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고, 이내 남자의 공격을 방어했다. 그러나 다우드 님의 체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끼어들지 마라. 그래, 저건 다우드 님의 싸움이었고, 내가 끼어들 자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끼어들고 싶었고, 끼어들어야만 했다. 마스터는 오로지 자신의 목숨만이, 이 결투에 걸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분은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고래잡이는 고래를 잡으면서 산다. 고래를 잡기 위해서는 그들을 통솔할 선장이자 리더가 필요했다. 다우드 님은 바로 선장이자 리더였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의 존재는 우리들의 세계에 있어서 너무나 소중하고 무거웠다. 나는 내가 있는 이 세계가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우드 님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저 분은 우리를 위해, 그리고 당신 자신을 위해 살아 있어야만 했다. 그래,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코흘리개마냥 의존하지 말라고 다우드 님은 역정을 내겠지.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당신이니까, 나는 이기적이면서 우리들 모드를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남자의 권총이었다. 본래의 단발식을 개조한, 약실에 단 한 발이 남아있는 권총.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은가? 그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른팔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내 왼팔은 아직 멀쩡했다. 총은 바로 나의 눈 앞에 있었다.
"토마스, 무슨 짓......!!"
다우드 님의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고, 남자는 그 목소리에 이끌려 나를 바라보았다. 검을 쥔 한쪽 손은 여전히 마스터를 압도하고 있었고, 푸르스름한 빛이 남아있는 왼손은 그 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스터를 향해 한 발자국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가던 그 발은 나의 모습을 보고 망설이듯 허공에 멈춰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야 안에서는 한없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당황한 마스터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나에게 무언의 외침을 건네고 있었다. 당장 멈춰.
죄송합니다, 다우드 님. 이번 역시 마스터의 명을 따를 수 없을 것 같군요.
나는 방아쇠를 당겼고, 이윽고 왼손이 뒤로 밀리는 듯한 묵직한 반동을 느꼈다. 하하하, 그렇게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치더니, 결국 나는 고래잡이의 생활에 이토록 익숙해져 있고, 몰입해 있었던 모양이야, 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총알은 남자의 얼굴에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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