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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아너드

까마귀 이야기 - 10화

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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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던월이 바람이 잘 부는 항구도시라지만, 두꺼운 제복을 입고 무기까지 장비한 채로 햇볕 밑에 하루 종일 서 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시기적으로 날씨가 본격적으로 풀어지려면 한참 남았을 텐데 오늘의 더위는 참 유별났다. 늙은 사람들이야 ‘예전에는 날씨가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말야. 내가 어렸을 때는 말이지, 이 근방은 전부 숲이었다고. 도시 밖으로 한 10분만 걸어가도 곧바로 풀숲이 보여가지고 여름에는 거기에서 볕을 피했다구. 그런데 그걸 두고 못보고 싹 밀고 길을 포장해버려 가지고 말이야, 날씨가 이렇게 무더운데 피할 그늘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보이고…’하고 옛 던월 시절을 토로하곤 했지만, 젊은이들은 그 시절에는 아예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노인들 추억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피서 관습을 따를 환경이 도저히 되지 않았던 터라, 상사들의 눈을 피해 건물 그늘에서 노닥거리거나 잡담을 나누는 나름의 방식으로 더위를 날 수밖에 없었다. 여자 얘기, 도박 얘기, 배급품 이야기, 역병에 대한 걱정거리, 어디선가 주워들은 가십거리 등등……’하운즈 핏’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죽이려고 이들은 한 이야기를 하고 하고 또 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야기에는 그저께 처형당한 두 명의 하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시신이 마당 한 가운데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 제독이 끌고 간 공주, 군인들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어린 소녀의 울부짖음은 고스란히 빠져 있었다. 술집 다락방에 배어 있었던 진한 피 냄새와 피웅덩이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흉흉한 시대에 흉흉한 이야기를 해 봐야 정신에만 해로우니, 그들로서는 그쪽 생각은 제독이 대신 알아서 잘 해주기를 기대할 따름이었다. 제독은 포악한 성미가 지나칠 때가 있었지만, 그 점만 제외한다면 그럭저럭 유능한 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눈치 없는 누군가가 꺼낸 술집에 감금된 가정교사 이야기에 한껏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 가정교사가 워낙 젊고 예쁘니, 어쩌면 나이 많은 해블락 제독이 마음을 두고 있지 않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제독이 유독 초조하게 굴었던 것도 어쩌면 그 음심을 감추기 위해서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평소대로라면 제독의 귀에 이 말이 들어가기라도 했다가는 전부 다 직위는 물론이고 목이 멀쩡할지를 걱정해야 할 테니, 가십을 떠들기 전에 알아서들 자신들의 입을 막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일이면 누가 피 섞인 오물을 토하고, 누가 피눈물을 흘리게 될 지 아무도 알 길 없는 시기였다. 현실적인 걱정을 해봐야 딱히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반년 넘게 던월을 야금야금 잠식해온 불안에 빠져들 뿐이라는 것임을 이들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던월의 무더운 하늘 아래에서 지저분한 이야기는 한없이 계속되었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 누군가가 술집 어딘가에 남아있을 내용물 담긴 술병을 찾아 다니다가, 허탕만 치고 화풀이 겸 뛰쳐나온 것이겠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술집에 남아있는 술이라봐야, 지금쯤은 식초에 거의 가까워졌을 테니 말이다. 쿵, 하고 문이 닫혔다. 어차피 다시 술집에 들어가게 될 텐데, 문을 닫을 필요가 있나? 그들 중 누군가가 생각했다. 또각, 또각,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 잡담을 하던 이들 중 하나가 고개를 들었고, 그 허탕친 녀석을 비웃을 요량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술집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웃음이 사라졌다. 두리번거리던 그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누가 문을 닫았는지 알아냈다.

닫혀 있었던 아파트 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치 아침산책이라도 나온 것마냥 태연하게 행동하는 것과 달리, 머리부터 발 끝까지 새카만 옷을 입어 한 눈에도 수상해 보였다. 옷 여기저기 해어지고 실밥이 튀어나온 것이 마치 깃털이 곤두선 것 같았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긴 코트,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린 후드, 해골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가면, 부서진 가면 틈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한 손에 들려 있는 긴 검까지.

“야, 일어나!!”

또각, 또각, 또각.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무기를 꺼내서 조준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정작 당사자의 걸음거리에 다급함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이, 오늘도 좋은 날씨네요. 그 댁 어르신은 오늘도 건강하신지요, 라는 인사치레와 함께 수다라도 시작할 것처럼, 한가롭기 그지없는 모양새다. 그렇지만 군인들은 알고 있다. 그 한가로움이란 반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도무지 떠올릴 수도 없는 비상식적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물며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그 남자가 정말로 정다운 친교라도 나누려고 다가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그 가면이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요사이 벽에서 자주 본 얼굴이었다.

“멈춰! 멈추라는 말 안 들리나!?”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한참 전에 쇠락하기 시작한 그 주택가 한가운데서, 마치 반 년 전의 과거에서 곧바로 지금으로 도약이라도 해온 듯 느긋한 걸음거리는 여전히 그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 간격이 좁혀질수록 남자의 표적들의 표정은 점점 우스꽝스러워진다. 그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리고 여전히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며, 그 까마귀 같은 남자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린다. 동시에 그것을 신호 삼아 일제히 방아쇠가 당겨지고, 귀청을 찢는 듯한 화약의 폭음이 고요를 깬다. 흥분한 기색도, 긴장한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로, 남자는 태연히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시간이 멈추었다. 찰나와 찰나, 0에 한없이 가까운 순간의 틈바구니에 세상이 그대로 박제되었다. 그 박제된 세상 속에서도 남자만은 여전히 제 시간 위를 걷고 있었다. 잿빛 세상에 못박혀버린 총알은 그의 미간에 닿을락 말락 한 채로 떠 있고, 그와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햇빛은 해빙기의 얼음조각 같은 모양새로 허공에 몸을 기대고 있다. 정지된 세상 속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남자가 걸을 때마다 나는 흙먼지 소리와, 옷 사이로 바르작거리는 금속음뿐이었다. 남자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초조와 공포, 당황으로 가득한 눈동자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향할 곳은 바로 여긴데 말이다.
고드름 같은 땀방울이 이들의 턱 끝에 맺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내리쳤다.

*

손때 묻고 빛 바랜 나무 벽과 문짝, 녹슬어 제구실도 못하는 경첩, 테두리가 헐어버린 간판들은 한때 이곳의 영광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부유한 상인들이 자기네들의 리그를 형성한 카페나 각계에서 명성 높은 이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번화가의 살롱만큼은 아니었지만, 하운즈 핏도 예전에는 ‘이쪽 부류’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한 곳이었다. 공장지대를 전전하는 노동자들이 범접할 수 없는 우아함과 귀티가 넘쳐흐르는 사교장에 대해 막연한 지식만 갖고 있듯이, 부유하고 고상한 귀족과 부르주아들 역시 하운즈 핏의 너저분하면서 안락한 실체를 알지 못했다. 밀주와 위법 약물, 그리고 그 외의 밀수품 교역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하운즈 핏이었다. 던월 사람들 중 제법 많은 사람들은 준법정신을 지켜가면서 물품을 들여오기를 원하지 않았고, 관리들이 세관을 통과시키는 것조차 꺼리는 물품들을 원하는 사람들 역시 많았다. 유력 가문이 바뀌고, 황제가 바뀌고, 강산이 여러 번 바뀌면서도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그래서 하운즈 핏은 사람들의 수요를 먹고 더욱 번성해갔다. 자연 이곳을 애용하는 단골들은 예의범절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투성이여서 하운즈 핏이라고 하면 누구나 고성과 칼부림이 가시지 않는 불량배들의 소굴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싸움에 익숙해진 인근 주민들은 그런 소리가 들릴라치면 어린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모은 뒤 재빠르게 창문과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 싸움이 어찌어찌 끝나면 남정네 몇몇이 술집으로 들어가 혈투의 잔해를 정리했고, 바텐더들은 태연자약하게 다시 술을 팔았다. 이렇게 하운즈 핏의 하루는 시작하고, 또 끝을 맺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곳의 그 악명 높은 번영도 종말을 맞았다. 역병이 던월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니 술집을 방문하는 것은 산 손님이 아닌 죽은 손님들뿐이었다. 소박한 옷 대신 포대자루를 뒤집어쓴 손님들에게서 돈을 요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피눈물과 피와 분간이 안 되는 침을 흘리며 문을 두드리는 병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술이나 밀수품 대신 사람들의 살이었다. 사람의 생살에 대한 수요와 시체의 공급이 치솟자, 평온한 시기일 때에는 코빼기조차도 보이지 않았던 군인들이 쳐들어와 병자들을 사살하고 생존자들을 다른 지역으로 격리해 버렸다. 그 이후로 며칠 동안 하운즈 핏 앞의 공터에서는 사람 살 타는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냄새마저 가시자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하루가 멀다 하고 시끌벅적했던 거리는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물론 이 정적은 노동자나 술꾼들의 천박한 음주가무로 먹고 살았던 하운즈 핏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다. 여제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반역자가 감옥에 갖히고, 무남독녀가 자취를 감춘 뒤에도 역병이 사그라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요란하고 선정적인 포스터로 가득했던 벽은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수리를 받지 못한 간판은 녹슨 못을 버티지 못하고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며 내도 수리공을 부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주민들이 미처 치우지 못한 쓰레기는 던월의 뜨거운 햇빛과 바다의 습기 속에서 말랐다가 축축해지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거의 발효되기에 이르렀다. 알음알음 찾아오던 뱃사공들도 더 이상 이곳의 싼 술을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유일한 손님은 오직 쥐와 녹색 물이끼뿐이었으니, 술집은 무정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썩어가는 어머니 던월과 사이 좋게 그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바랜 세상에 느닷없이 선명한 색채가 덧입혀졌다. 알록달록한 군복과 금속 헬멧, 그리고 눈을 찌를 듯하면서도 기분 나쁜 거무죽죽함이 뒤섞인 빨강. 탁한 색채로 물들어 있었던 술집에 그 색깔이 덧입혀진다. 그 뿐이 아니었다. 지난 몇 개월의 침체기 동안 기껏해야 삐걱대는 경첩 소리나 들렸던 술집은 오랜만에 사람들의 활력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 이것이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 상스러운 욕설 같은 사소한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공포와 고통처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소리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찢어지는 비명소리, 울음소리, 폭발음, 쇳소리, 무너지고 깨지는 소리투성이였지만 이것으로 잠시 활기를 되찾았으니, 지금은 무덤 속에서 잠들어있을 과거 술집의 단골들은 분명히 흡족해할 것이다.

*

이제 남자는 지붕 위를 걷고 있었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갈 때마다, 이곳에서 지내던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가끔은 변덕스러운 바람에 기우뚱하고, 가끔은 삐걱대는 나무 판자 하나에 비틀거리며, 그가 걷는 모양새는 하나같이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망설임 없는 그의 발이 지나갈 때마다, 바닥에는 붉은 자국이 점점이 남았다. 잠시 그는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이 길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다 알고 있었기에 들킬 염려는 별로 하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만 다니려는 버릇은 그가 얼마 전부터 체득한 일종의 고질병이었다. 지저분한 골목길, 새하얀 왕궁 통로, 벽난로 밑 비밀 입구에 쇠창살 틈새처럼, 어둡고 불결한 곳에서 빠져 나온 이후에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비밀주의를 고수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소양은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하나의 그림자처럼 온갖 장소에 녹아 들어가는 것이 그의 특기가 되었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각진 통기구, 허술하기 그지없는 판자를 덧대 만든 통로, 어두운 하수구와 녹슨 격자, 칠이 벗겨져가는 아파트의 숲. <전염병을 막을 수가 없다>, <방관자께서 우릴 지켜보실지니>와 같은 조악한 낙서들. 그의 모든 감각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그에게 알려줬으며, 이 은밀한 속삭임은 거의 틀리는 일이 없었다. 하기야 이곳에서 짤막하게나마 살았고, 이곳에서 죽음을 맞은 이가 이를 틀릴 수가 있겠나.

경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발걸음으로 남자는 지붕 위로 올라가, 그 끄트머리에 발뒤꿈치만 걸치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모처럼 날씨가 맑은데다가 볕도 좋았다. 신선한 과일과 갓 구운 빵, 짭짤한 햄을 바구니에 바리바리 싸들고 소풍을 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근처에는 어린 소녀와 도시락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만한 풀밭이 없었다. 그의 어깨 위에 올라타 덜 익은 열매를 따려고 손을 뻗는 소녀도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햇빛은 바깥 공기에 드러난 그의 눈을 연신 콕콕 찔러댔다. 정신이 산만해지는 듯한 그 감각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그는 정확히 위치를 잡은 뒤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

약물로 공포를 느끼게 못하게 했다고는 하나, 그것이 톨보이의 더위마저 식혀주지는 못했다. 아직 더워지기에는 이른 계절이었지만 무거운 갑옷과 따뜻한 햇볕은 그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등 뒤에서 희미한 열기를 내뿜는 고래기름 통을 툭툭 치며, 군인은 조금이라도 땀을 식힐 바람이 불기를 원했다. 콧잔등을 타고 내려오는 비지땀을 닦자니 금속으로 된 튼튼한 투구와 장갑이 방해되었다. 그는 야속한 햇빛에게 욕이라도 퍼붓기라도 할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목을 뒤로 젖힌 자세 그대로, 칼 한 자루가 그의 눈을 뚫고 들어왔다. 한쪽 시야가 새까맣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약물로도 막지 못한 고통이 파도처럼 머리 속을 헤집는다. 일찍이 체험해본 적 없는 감각에 몸부림치고, 차마 들을 수 없는 괴성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칼을 쥔 억센 손아귀는 그 마지막 저항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그대로 뽑혀나간 칼날은 가차없이 군인의 목줄기를 꿰뚫었다. 윽, 윽, 윽. 구멍 사이로 새어 나오는 공기와 목소리, 사납게 치솟는 핏줄기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며, 빛을 잃어가는 톨보이의 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검은 그림자를 두른 해골이었다.

기갑병의 거체는 맥없이 쓰러졌고, 한참 동안이나 그 잔향은 계속되었다. 사방에 기계 파편을 흩뜨린 채로 꼴사납게 널브러진 저 잔해들은 한동안 던월을 지배했던 톨보이의 공포스러운 전설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게 하고 있었다. 그는 목에 박힌 검을 가볍게 뽑아내고 한 번 휘둘러 흥건한 핏방울을 바닥에 털어냈다. 아직이었다. 아직 한참 더 남아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었다. 이윽고 그는 왼손을 들어올려 공간을 잡아당겨, 그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던 병사의 눈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길게 자란 콧수염, 피로감이 역력한 표정, 그렇지만 아직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가까운 그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자, 상대방의 그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그 청년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누르기도 전에, 손가락에 낯선 이물감을 느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그 병사는 오른손에 손가락이 세 개만 남아있다는 것을 목도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검지와 중지를 보며 입이 벌어지려는 찰나에, 해골 가면은 그 입을 손으로 막았다. 까마귀처럼 검은 옷을 휘날리며, 가면 틈새로 번득이는 짐승 같은 눈으로 청년을 쳐다보며, 칼날이 단숨에 목줄기에 꽂혔다. 그 순간 억지로 벌어지려는 그 입과 벌겋게 익은 목, 차가운 금속의 촉감, 눈물이 차오르는 두 눈, 그 모든 것이, 그 모든 과정이 눈 앞에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그의 파란 눈은 그 광경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고, 그대로 상대방의 머리를 움켜쥔, 다음 검을 옆으로 당겨 뺐다. 잘 벼려놓았던 칼은 피며 힘줄이며 뼈 같은 온갖 이물질에도 거리낌없이 옆으로 빠져 나왔다. 왼손에 실려 있던 무게감이 순식간에 가벼워짐과 동시에 병사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를 발견한 또 다른 병사들의 고함소리며 비명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손에 쥔 불행한 청년의 머리통을 그들에게 던졌다. 텅 빈 눈동자를 한 머리를 누군가가 직격으로 얻어맞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그는 그 작은 소란에 조그마한 금속 덩어리를 집어 던졌다. 그들이 찰칵,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폭탄에 장착되어 있었던 수십 장의 칼날들이 일제히 이빨을 세운 뒤였다.

그리고 그 칼날 세례가 끝난 뒤, 진짜 폭풍이 그들을 향해 쇄도해 왔다.

*

어디선가 와르르 하고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칼리스타가 비몽사몽한 잠에서 깨어난 것도 그 소리 때문이었다. 어두운 방 구석에서 그녀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당혹감이었다. 자지 않으려고 그토록 기를 썼지만 어느 틈에 기절할 듯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문은 밖에서 걸어 잠겨져 있었고 창문은 두꺼운 커튼이 내려진 지라, 작은 방 안에 있는 빛이라고는 고작해야 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뿐이었다. 곧게 뻗은 빛줄기 사이로 이따금 가느다란 먼지들이 깜빡깜빡 숨었다가 머리를 내밀곤 했다. 바깥은 한낮인 것은 분명한데 이 방만은 온종일 밤이었다. 여기서 얼마나 지냈던 걸까. 하루였나? 아니면 이틀 정도일까? 정확한 시간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칼리스타는 시간 감각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침대에 일어나 앉자 머리가 약간 어지러워졌다.

“에밀리?”

맞은편 어둠에 숨어있는 침대를 바라보며, 습관적으로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이라고는 침대와 마찬가지로 어둠 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뿐이었다. 초침이 시계판 위를 한 바퀴 돈 다음에야 칼리스타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 방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네에, 하고 졸음에 겨운 그 앳된 목소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침대에서 가만히 몸을 일으키고, 창가로 다가섰다.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커튼을 들추자, 하얀 햇빛에 부옇게 물든 던월의 시가지가 보였다. 제 눈에는 이토록 선명한데 제 손이 닿기에는 이다지도 아득하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시선을 왼편으로 돌리자, 이번에는 하운즈 핏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저 술집은 마치 건물 자체가 녹슬어가는 것처럼 붉게 보였다. 저만치 건물 틈새로 빈 공터가 눈에 들어온다. 평소와는 다르게 어쩐 일인지 공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작은 점 두 개가 보였다. 시체 두 구가 들어있는 커다란 부대자루. 그 광경을 다시 본 칼리스타는 어지러움에 입이 바짝 타들어가는 듯 했다.

머리에 주머니를 뒤집어쓰고, 총검으로 등을 쿡쿡 찔리며 끌려가던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딱딱한데다가 농이라고는 몰랐고, 또 한 명은 게으르고 새로운 동거인에게 성적인 농담을 던지기도 하는 조신치 못한 사람이었다. 정숙하면서 냉담한 분위기를 꺼리는 칼리스타로서는 좋아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강제로 무릎을 꿇려지고, 그 손목을 밧줄로 결박당할 때까도 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두 하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깨닫고 울부짖을 수 있었던 것은, 총의 장전음이 지척에서 들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유언조차 되지 못했던 비명소리는 두 번의 발포음과 동시에 끊어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숙녀답지 못하고 신사답지 못했으며, 교양과도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람들이었다고 해서 이들은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한 사람들이 절대로 아니었다. 절대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소녀는 사라졌고 남자는 이제 이 세상에 없으니, 이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은 이제 추호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숙부의 다정한 얼굴이 그리웠다. 며칠 전의 암살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남으셨다는 그 분, 자신의 마지막 혈육이며, 자신처럼 배를 좋아하셨던 그 분, 만날 때마다 미인이 되어가고 있다면서 칭찬을 하던 그 분. 그 분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저 허술한 문짝이 언제라도 걷어차이고, 자신에게도 병사들이 찾아와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 것만 같았다.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은 태산 같건만, 그녀는 바로 그 상황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어디로 도망가야 한단 말인가? 칼도 쓸 줄 모르고, 총을 다룰 줄도 모르고, 발도 느린데다가 헤엄조차 치지 못하는 이 자신이 무슨 수로 병사들을 따돌린단 말인가? 지난 날 읽어온 책들 안에 담겨 있었던 현자들의 해묵은 금언이나 학자들의 학설이나 상식 따위는 현실의 폭력 앞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그 안에는 나를 지키기 위해 남이 피를 흘리게 하는 법 따위는 쓰여져 있지 않았고, 책 밖에서도 그 방법을 배운 적은 없었다. 그래서 칼리스타는 너무나 무력했다.
강철처럼 강인하고, 갈대처럼 과묵했던 그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서 쓰러진 그 순간부터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씻어낼 수 없는 무력감이 새겨져 있었다. 틈만 나면 수업을 피해 도망 다녔던 개구쟁이 소녀는 마룻바닥에 흥건한 피와 자신을 붙잡은 손을 움켜쥐며 끔찍한 오열을 터트렸다. 그녀는 단 한번도 소녀의 울음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이나 같은 일을 겪은 비통함과 서러움으로 가득한 울음소리에 칼리스타는 심장이 조여지는 것 같았다. 가슴에 소녀를 품었을 때 그 양 눈에 떠오른 빛은 앞으로도 잊혀질 것 같지 않았다.

‘제독님, 이 여자는 어떻게 할까요?’

그 상황 속에서 그녀가 최선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그 소녀를 부둥켜안고 같이 떠는 것뿐이었다. 판사의 입만 바라보는 재판장의 죄수마냥, 자신의 죄도 모르면서 자신의 판결을 제독의 저 커다란 입에 위임한 채로.

‘그냥 냅둬.’

그 판결에 어찌나 안도했던지. 그렇지만 안도에 뒤이어 칼리스타에게 찾아온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치욕감이었다. 저 몇 음절의 말, 마치 사람의 목숨이 술 한 병의 값조차도 되지 못한다는 듯 대수롭잖게 생과 사를 언도하는 저 목소리에 분개했다. 만난 지 그리 오래 된 사이가 아닌 두 사람은 당연히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품고 있었던 것은 며칠 간 지내면서 자연스레 체득한 객관적인 사실 절반과, 막연한 추측이나 억측 절반이었다. 이런 불안정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황제에 대한 충성심, 황녀, 그리고 사건의 열쇠가 될 호국경이라는 몇 개의 매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습게도 서로에 대한 불확실함은 동등했지만, 힘의 균형은 제독에게 크게 쏠려 있었다. 술 한 병만도 못한 칼리스타의 목숨은 서로에 대한 막연한 의혹으로 점철된 제독의 한 마디에 달려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칼리스타가 자신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만 은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칼리스타 역시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그 남자나 두 하인의 신세가 되었을 테니. 그럼에도 제독의 억측 덕분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는 게 그토록 부끄러웠다. 만약 약간의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를 비난했어야만 했다고, 그녀는 후회했다. ‘이 비겁한 인간 같으니라고! 신께 부끄럽지도 않습니까?’라는 식으로 그와 다른 왕당파들에게 무언가를 말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칼리스타의 중얼거림이 그녀 외의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입술만 달싹이다 혼절한 듯 움직이지 않는 소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현명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에서 할 말과 할 일을 올바르게 가려 할 줄 알았다. 부모 없이, 가문의 방패 없이 성장해온 그녀 나름의 처세술이 지금의 그녀를 있게 했다. 한때는 이 처세술을 살아남는 데에는 제법 쓸만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마룻바닥을 흐르는 피는 그녀의 그러한 태도에 무언가 결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비겁한 인간’? 비겁한 건 누구였지? 무력한 사내의 뒤통수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제독인가? 무쇠 같은 사내의 위업에 남몰래 시기와 열등감을 표출하던 펜들턴 백작인가? 어쩌다가 목격한 사내의 왼손을 보고, 소녀에게 흑마법의 마수가 뻗치지 않도록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고위주시자 마틴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언제부터인가 세 왕당파 사이를 흐르기 시작했던 그 기묘한 기류를 목격했으면서도, 끝끝내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사내에게 말하지 않았던 자신인가? 공주를 매개 삼아 호국경이자 암살자 되는 남자와 가까이 지내면서도, 그저 ‘당사자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라는 뿌리를 알 수 없는 자기위안에 가득 차 있었던 자신이었는가?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설령 비겁자가 누구라고 확언한들, 이미 결과는 나오고 말았다. 자신과 세 남자, 그리고 술집의 모든 이들과 제국을 주무르는 이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빚어낸 결과물이 눈앞에 나와 있었다. 자신이 흘린 피 위에 엎드려 절명한 사내와, 아버지와도 같던 남자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소녀 한 명이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헌신적인 자가, 전신은 피범벅에 파란 눈을 감지 못하는 개죽음을 맞은 데에는 자신의 보탬 역시 작지 않았으리라. 칼리스타는 그렇게 확신했다.

또한 그녀는 그 시체를 자루에 밀어 넣는 늙은 뱃사공에게 이 모든 죄책감과 책망을 몰아붙이려는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치졸하기 그지없었다. 체념과 순응에 익숙해져 보면서 못 본 체한 자신과, 시기와 질투, 탐욕과 같은 악덕에 골몰하여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세 남자에게 돌려야 할 화살은 정작 당사자가 아닌 뱃사공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화살이 자신에게 향했을 때, 그리고 세 명에게 향했을 때 벌어질 고통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 화살을 비슷한 처지일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폭력과 권력에 무력한 사람에게로 돌렸던 것이었다. 왕당파들과 함께 있었기에, 뱃사공 역시 남자의 죽음에 있어서 공모자였으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공포와 후회, 망설임과 비통으로 가득 차 있었던 뱃사공의 눈빛을 보면서, 그녀는 그 역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음을 상기했다. 당신도 무서웠겠어요. 그렇죠? 죄송해요, 새뮤얼. 간절한 눈빛과 절망적인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끝내 두 사람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할 말조차 주고받지 못했다. 뱃사공과 가정교사는 급하게 휘갈겨 쓴 몇 문장이 담긴 쪽지와, 조명탄이 설치된 조악한 신호기를 통해서야 비로소 서로가 희망의 공범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뱃사공이 낡은 기계에 담은 것은 희망이었다. 자신들을 도와주고, 진실을 이 세상에 밝혀 호국경의 불명예를 지워줄 희망 말이다. 그렇지만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기적이 아니던가? 기적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이 비좁고 허름한 술집을 가운데에 두고 일어난 일부시종을 과연 누가 알아낼 수 있을까? 설령 알아낸다 한들, 이것을 세상에 알릴 힘을 갖고나 있을까? 칼리스타가 아는 한 그것이 양쪽 다 가능한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제 그는 이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칼리스타는 정말로 죽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조악하고 멸시와 핍박으로 가득한 삶이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한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그녀의 숙부는 말했다. 책 속에서 본 것처럼 광활한 바다를 탐험하고, 남자들과 칼싸움을 벌이면서 가뿐하게 이들을 이기고, 천국과도 같은 보물섬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거창한 꿈을 품더라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아니면 맑은 날 볼 수 있는 하늘과 상쾌한 바람, 귀여운 자식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만족하는 흔하디 흔한 꿈을 품는 것도 좋다고도 했다. 중요한 것은 삶에 확신을 갖고, 그 안에서 앞날을 나아가게 할 힘을 줄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그녀의 숙부는 몇 번이고 말했다. 삶이란 고통으로 가득할 뿐 아니라, 그 고통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교차하는 일 투성이라고 숙부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그 족적 속에서 무언가 자신만의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가치 있을 거라고 난 생각한단다. 알겠니 칼리스타? 칼리스타는 숙부가 군인으로 살면서, 막중한 책임을 지닌 장교로서 많은 비밀을 가져야 했으며 이에 따른 온갖 쓰라린 일을 겪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지혜를 믿기에, 그녀는 그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이는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는 더 많은 데다가 괴상한 버릇까지 지닌 뱃사공과, 괴팍하고 변태적이기까지 한 과학자들을 칼리스타가 부러워하는 이유였다. 결점이 많은 인간들이었지만, 어찌되었건 이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기울어져가는 제국 속에서 온전히 서 있으려고 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살아남아서 먼 미래에 살포시 방문할 행복을 기다리고 찾아 다니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일시적인 쾌락에 골몰한 것 같아도 그들은 자신의 앞날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힘이 닿는다면 자신의 손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밀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한때 칼리스타는 자신에게 외설적인 행동을 한 피에로와 걸핏하면 술이나 찾는 소콜로프에게 염증을 느꼈지만, 그들에게는 자신의 염세적인 태도를 뛰어넘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근본적으로는 똑같았다. 살아남아 행복을 찾고, 그 행복을 조금이나마 주변에 나눠주는 것이야말로 체념으로 점철된 그녀의 인생 속에서 유일하게 체념할 수 없는 가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칼리스타는, 홀로 남은 탑 안에서 조용히 초월자들에게 기도를 했다. 교단이 숭배하는 신이라도 상관없었다. 저 심해 바닥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조소한다는 무시무시한 방관자라도 상관없었고, 판디시아의 미개인들이 믿는다는 산제물에 굶주린 우상들이라도 상관없었다. 여전히 주변은 심연 속에 있는 것처럼 깜깜했지만, 기적을 바라는 희망만은 제독의 총부리와 병사들의 음흉한 눈길로도 앗아가지 못했다.

‘제발, 신이시여…만약 계시다면, 저에게 희망을…’



쿵.

요란한 응답이 온 것은 그녀의 기도가 또다시 시작되었을 즈음의 일이었다. 정적을 깬 그 문소리에 칼리스타는 귀를 천천히 갖다 댔다. 모든 감각을 바깥 소리에 집중하니,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자물쇠가 걸린 두꺼운 나무판자 너머로, 누군가가 헐떡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죠?”

이번에는 무엇인가가 문을 긁는다. 득득득득, 두서없이 문을 긁는 소리에 칼리스타는 불안감을 느꼈다. 자신을 감시하는 병사들의 용태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누구시죠?”

혹시 우는 자들인가, 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입에서는 피를 쏟고, 시도때도 없는 구토에, 병적인 홍반 증세가 나타난 창백한 얼굴과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퀭한 눈동자를 떠올린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이미 피와 시체로 숱하게 더럽혀진 술집이었으나, 이곳을 지금 지배하는 던월의 군대는 역병에 대한 혐오를 지닌 산 자들이 월등히 많은 집단이었다.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은 가늘게 흐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렇지만 그 울음소리는 슬픔과는 명백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으며, 무언가를 억지로 참는 것에 가깝게 들렸다. 그 울음소리와는 별개로, 저 멀리서 누군가가 목이 째져라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리는 듯 했다.

“누구세요? 괜찮으세요?”

자신의 물음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누군가는 무어라고 횡설수설하는 듯 했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문을 잡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문고리를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그런다고 부서질 문은 아니었지만, 칼리스타는 그 사나운 기세에 덜컥 겁이 나 몸이 굳어버렸다. 이제 그 목소리는 더욱 또렷해져, 무어라고 지껄이는지 대강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열어줘, 열어줘.”

덜컹거리는 소리에 섞여, 누군가가 열어달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 말도 없이, 최소한의 예절도 없이, 끊임없이 거칠게 문을 흔들면서 열어달라는 말만을 잇고 있었다. 그 병적인 행동에 이성이라고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으니, 실상 그 남자도 칼리스타 만큼이나 무엇인가에 대단히 겁에 질려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문을 열 수 없었다. 애초에 밖에서 잠긴 문이라 열 수도 없었지만, 지난 며칠 간 뿌리내린 불신과 두려움이 문을 열려는 최소한의 시도조차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것이 틀림없을 저 신음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두려움은 그대로 눈앞의 사태를 방관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지난 수 개월의 혼란 속에서 안이하게 남을 믿었다가는, 문이 열리는 순간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쥐고 험한 일을 당할 지도 모를 판이었다. 그럼에도 칼리스타 안에 자리한 한 가닥의 미련과 인간된 미덕이 그녀의 발목을 기어이 붙잡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 목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신음소리 뒤로 모습을 감춘 채 다가오는 또 다른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착란 상태에 빠진 문 너머의 장본인은 바로 자신의 뒤로 다가오는 무엇인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저 ‘열어줘, 열어줘’를 반복하며, 필사적으로 문을 긁는 데에 전념할 따름이었다.

“이보세요, 어디 다치셨……”

그리고 그녀가 무엇인가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발걸음 소리가 문 바로 앞에서 멈춘 것과 긁는 소리가 멈춘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그 불길한 침묵 너머로 들리지 않는 몸싸움의 기척이 느껴졌다. 호기심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칼리스타는 저도 모르게 열쇠구멍에 눈을 가까이 댔다.

그 눈 안에 한 가득 들어온 것은, 핏발선 눈을 까뒤집고 혀를 내민 채로 피거품을 입에서 진탕 쏟는 병사의 얼굴과, 그 배로 툭 튀어나온 날카롭고도 길쭉한 빛이었다. 그 기이한 빛이 뒤로 쑥 빠져나가니, 붉은 피가 그 상처에서, 입에서, 코에서 샘솟듯이 쏟아져 나왔다. 검은 형체에게 뒷목을 잡히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내장을 토해낼 기세로 기침을 해대며 그 병사는 문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악!”

칼리스타는 문을 짚은 채로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두 번째였다. 한 번만 보아도 감당하기 힘든 처참한 광경을 불과 며칠 새, 그녀는 두 번이나 보고 말았다. 문 너머로 희미한 단말마가, 끊어져가는 생명의 목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주저앉아 뒷걸음질치는 그녀와 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바깥을 분리해 놓기에, 저 문 한 장은 너무도 빈약했다. 또,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개 가정교사의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부모의 죽음도, 가문의 몰락도, 삼촌의 암살 미수도, 그 사람의 죽음도, 여자아이와 떨어진 것도 그랬듯이, 손을 내미는 것조차도 허용치 못하게 하는 거대한 힘이 또다시 그녀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의지와 용기, 생기와 도덕감을 깡끄리 짓밟으면서, ‘늘 있었던 일이니까, 가만히 있어. 곧 지나갈테니.’하고 가증스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그 속삭임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칼리스타, 싫어! 가기 싫어! 코르보 어딨어? 코르보, 코르보, 어디 있어? 코르보!! 칼리스타, 내 손 놓지 말아줘요, 네?’

그런 그녀를 매섭게 질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장례식장 구석에서 숨죽여 울던 울음소리이며, 자신을 격려하던 숙부의 목소리였고, 서럽게 제 엄마와 아빠를 찾던 공주의 목소리였다.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외면과 순응, 배신과 질투 속에 빠져 죽어간 남자의 무언 속 한마디이기도 했다. 칼리스타는 벌벌 떨면서 일어났다. 아직도 두려움이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용기나 명예욕, 헌신과 희생에 특출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만큼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행동하기 위해서 굳이 그런 덕목들을 열거해야 하는가?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 넌 아직 어린애잖니. 넌 여제가 되겠지만…….아직 어리광 피워도 된단다. 힘든 일이 있으면 누구한테 기대도 되는 거야.’

그 말을 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잖은가. 제국의 운명을 짊어졌다고 한들, 아직 산과 들을 뛰어 놀고, 책을 읽으면서 공상의 나래를 펼칠 10살의 소녀에게는 버팀목이 필요했다. 오래 전부터 그 버팀목 역할을 해온 남자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할 때, 기꺼이 소녀를 칼리스타에게 맡겼다. 그 여린 손을 보듬어주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으며, 악몽에 시달릴 때에는 ‘괜찮아질 거야’라는 한 마디를 건네줄 그런 상대로서 자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덕망 높은 커나우 가문의 교양 있는 처녀, 가정교사였기에 이 일을 자처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용기 있거나, 황제의 자식을 양육한다는 영예에 심취하거나, 그저 전직 호국경의 명령에 복종하여 부산스러운 뒤치다꺼리를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칼리스타는 그저, 소녀에게 드리워진 그림자와 유년기의 자신에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에 이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비록 늪지대 위를 불안하게 떠다니는 종이배 신세더라도, 언제 빨려 들어갈지 전전긍긍하지만 않고 저 하늘과 멀리 펼쳐진 초원을 볼 수 있게 돕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일을 기꺼이 선택했던 것이다. 온갖 현란한 단어로 채색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그 일을 바랐었고, 같은 일을 경험한 어른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녀를 돌보았다. 이제 그 소녀는 곁에 없었지만, 그 짧은 순간 짊어지고 있었던 의무감은 여전히 그녀의 안에 남아 있었다.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의무였던 남자가,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제국의 운명의 무게에 허덕이면서도 그 소녀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자신을 믿었던 것처럼, 자신 역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검을 쓸 줄도 모르고, 총과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으며, 지략에 무지할 지라도, 곁에 있는 작은 어린아이라도 지키고 그 어린아이가 세상을 올곧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무력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칼리스타에게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도라도 해 보아야 했다. 그래서 칼리스타는 뾰족한 도리가 없었음에도 뒤로 도망가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

무기도 없으면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주먹질과 발길질에도 문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당장 그만해! 그 사람을 놔 줘! 무슨 짓이야!”

문 너머에서 이제 소란은 들리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누군가의 무거운 인기척뿐. 어쩌면 문 너머의 병사를 구하기에는 정말로 늦었는지도 몰랐다. 지금도 그녀의 건너편에 서 있을 그 누군가가 문에 몸을 기대는지, 문이 약간 칼리스타 쪽으로 기울어졌다. 여자의 손으로 어림도 없지만 둔기로는 부수기에는 충분한 이 허술한 문이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기에는 그녀는 너무나 절박했다.

“내 말 들려? 당장 그 사람을 놔 줘! 죽이지 마!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스타.”

문 너머, 굵고 나지막한 목소리에 칼리스타는 얼어붙었다. 무언가에 입이 가려진 듯 웅웅대는 목소리였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낯익은 목소리였다. 몇 번 들은 적 없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머리는 온 힘을 다해 이해를 거부하고 있었다. 다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칼리스타?”

‘……어른스럽구나, 에밀리는. 그래, 꼭 구하러 와 줄 거야. 에밀리의 기사님이라면 에밀리가 위험에 빠졌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나타나겠지?’

‘물론이에요.’

‘......새뮤얼의 목소리는 아니죠. 그는 지금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을 테니. 당신은 소콜로프의 목소리도, 그 음흉한 피에로도 아니에요. 그들은 병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돌아다닐 만큼 담력있는 사내들이 아닌걸요. 제독과 고위주시자, 남작의 목소리도 아니네요. 그들은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은 바로 그 사람일 텐데.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때 바닥에 쓰러졌고, 아이의 손을 잡지 못한 채로, 그 눈을 감지도 못한 채로, 저 바다 어디에선가 잠을 자고 있었을 텐데, 도대체 어째서, 어떻게 이곳까지…’

칼리스타는 문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이 벽에 부딪히고, 그녀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느릿하게 상념과 혼란의 바다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마룻바닥이 그녀의 몸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그 바다 속으로 빠져들었을 판이었다. 뒤로 물러나는 소리를 들었는지, 문 너머의 상대방 역시 살짝 옆으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낮게 무언가를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짝은 작열하는 폭풍에 떠밀려 산산조각 나면서 사방에 흩어졌다.

이틀 만에 방 안은 햇빛으로 가득 메워진다. 그리고 흰색 한가운데, 문 너머에는 그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원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붉고 탁해진 칼이, 또 한 손에는 창백한 병사의 머리가 쥐어져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았고, 머리를 옆으로 집어던졌다. 그와 그녀의 사이가 좁아졌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그 검은색 코트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옷깃은 헐고, 단추는 몇 개 떨어져 나갔다고 해서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 당찬 체격과 자신보다 머리 한 개는 더 큰 키에, 마디가 선명하게 드러난 억센 손까지. 모든 것이 똑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처럼. 그런데 이 냄새는 무엇인가. 시체의 산을 구르다 온 것처럼, 아니 시체 그 자체이기라도 한 것처럼,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제 막 숨을 거둔 이들의 냄새와, 이미 백골이 된지 오래 된 이들의 냄새를 한꺼번에 두르고 있었다. 어째서 이것만은 다른 것일까. 설령 옷이 추레해지고, 익숙한 해골가면이 없어지고, 그 가면의 깨진 귀퉁이로 엿보이는 푸른 눈, 아니 가면 밑의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져 있었더라도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치 죽음에서 돌아온 이처럼, 죽음 그 자체가 된 것처럼 달라진 저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위화감과 공포뿐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달라진 것일까. 도대체 왜,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참 동안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입을 열고, 넘쳐나는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 며칠 동안, 일 주일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수백 번의 비탄과 수천 번의 후회, 수만 가지의 상념을 머리 속에 끌어안은 채로 밤을 지새고, 피곤에 못 이겨 곯아떨어지면서도 다음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시작한 그 생각들. 단 하루 안에 끝내기에는 너무나 많은 생각과 말이 혈관 구석구석까지 꽉 차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할 말이 많은데, 당장에 하룻밤을 새도 모자랄 판인데, 왜 이리도 입은 열리지 않는지.

“코르보 씨.”

한참을 뜸들이던 끝에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라고는 고작 사내의 이름 한마디뿐이었다. 주저앉은 그녀에게 남자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덕에 이제야 칼리스타는 코르보의 손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한때 악몽에 시달리는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 손을 보면서, 그녀는 그에게서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넓고 푸근하며, 아이의 장점은 물론이고 결점마저 능히 보듬어주고 감싸 줄 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 손은 남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피비린내와 화약내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지키는 아버지의 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칼리스타의 눈에 들어온 그 손, 손톱 몇 개가 심하게 상하고 자잘한 흉터자국이 선명한 그 손은, 죄수이자 검사이며, 군인이자 살인자, 암살자이자 호국경의 손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이들을 잡아끌고 허덕이다가, 끝내는 무너지고 만 흔적이 저 손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칼리스타 역시 그에게 매달린 이들 중 하나였다. 이제 전신을 물들일 정도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저 사람을. 그래서 그녀는 차마 저 손을 잡을 수 없었다.

한참을 손을 뻗고 있던 코르보는, 칼리스타의 얼굴을 바라본 뒤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그 왼손에는 마틴의 시선을 잡아 끌던 이단자의 표식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칼리스타는 자신이 바라지 마지않던 ‘기적’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토록 잔인하고, 이토록 반갑지 않은 방식으로 기적이 실현되다니, 얼마나 얄궂은 존재인가, 신이란 건. 어딘가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웃고 있을 신의 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가면 틈새로 드러난 코르보의 눈은 무감동하여,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읽을 수 없었다. 칼리스타는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화가 나 있을지도 몰랐다. 영문도 모르고, 절망에 가득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지던 저 남자는, 마찬가지로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던 자신들에게 분노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한참을 애를 쓴 끝에 그녀는 풀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을 더듬어, 새뮤얼이 남긴 편지를 말없이 건네준 뒤 문으로 향했다. 코르보는 그의 곁을 지나치는 가정교사를 붙잡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깥은 맑았고, 이렇게 화창할 수 없을 정도였다. 때이른 더위가 찾아오고 있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대기는 건조했고, 그늘 아래에 있다면 더위를 쉽게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술집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고, 탑에서 술집으로 향하는 연결통로를 지나치면 나오는 다락방은 남자의 자취들로 가득했다. 침대 앞에 있었던 핏자국은 새로운 핏물로 가려져 있었다. 큼지막한 쥐 몇 마리는 진수성찬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 중 한 마리는 코르보가 있는 탑 쪽으로 향했다. 역병은 여전했다.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갔다. 포경선과 화물선, 여객선으로 가득했던 바다는 이제 간간히 지나가는 배 몇 척만을 업고 있을 뿐이었다. 여제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로 이 세태는 한층 더 두드러져, 지금은 일상을 누리는 것조차도 염증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투하는데도 그들의 노력은 왜이리 덧없어 보이고,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전망도 그저 입에 발린 말로 들릴 뿐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칼리스타가 품었던 희망의 예감이 한 순간의 신기루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적막에 휩싸인 계단을 내려가, 바를 지났다. 마치 며칠 전 끝으로 치닫던 코르보의 자국을 되짚어나가는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나간 마당에서도 온 사방이 시체투성이였다. 대부분 사람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몇몇 시체들은 불에 굽기라도 한 것처럼 새카맣게 타 있었고, 일부는 헬멧과 군도를 제외하면 거의 재만 남아 있었다. 농성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해방된 피에로와 소콜로프는 실험실의 셔터를 올리다가 칼리스타와 눈이 마주쳤다. 칼리스타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본 뒤 탑을 쳐다보았고, 두 과학자들은 전에 없이 지친 기색을 보였다. 하운즈 핏을 진동하는 낯선 탄내는 분명히 탑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남자와 이들이 저지른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기묘한 아크 파일런 장치가 옥상에 있었던 것 같았다. 칼리스타는 천천히 광장으로 걸어갔고, 마침내 두 구의 시체들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난 탓에 아주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것에 개의치 않고, 그녀는 두 장의 손수건을 각각 두 사람 위에 얹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언젠가 에밀리가 몰래 그렸다가 감춰놓았던 하운즈 핏 사람들의 낙서를 꽂아놓았다. 꽃을 구할 수 없는 지금의 던월에서 그나마 이것이 칼리스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문이었다.

‘저 분이 쓰러졌을 때 하려고 했던 조의인데, 이제 저 분께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네요. 이 모든 일이 끝난다면, 그때에는 당신들께 꽃다발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당신들과 제가 겪었던 작은 소란, 당신들을 향했던 저의 경멸에 대한 뉘우침입니다.’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칼리스타가 보는 미래는 온통 불확실한 안개투성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설령 퇴로나 나아갈 길이 없더라도, 희망조차 갖지 않는다면 어떻게 힘을 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저 광기와 절망으로 가득 찬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칼리스타는 다시 한번 숙부의 가르침을 믿기로 했다. 정말이지 야속할 정도로 맑은 날씨였다.


*

< 칼리스타 양에게.
제가 앞으로 저지를 일에 대해서는 부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무슨 일인지는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디 희망만은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직 에밀리 양과 던월에는 희망이 있으리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저는 코르보 씨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칼리스타 양께서 먼저 그 분을 뵙게 된다면, 탑에 설치해 놓은 섬광탄을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보는 즉시 최대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살아남으십시오. 모든 일이 끝난다면, 에밀리 양은 당신을 다시 필요로 하게 될 테니까요. >

그는 편지를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아까 술집에서 주운 편지를 꺼냈다.

< 매닝 대위, 우리는 하운즈 핏 술집에서 벌어진 역적 모의를 색출했네. 자연철학자인 피에로 조플린과 안톤 소콜로프가 연계되어 있었지. 그들은 이 제국을 몰락시키기 위해 반역자 코르보 아타노와 손을 잡았지. 이들이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혁신적이고 위대한 지식인들이라는 것이 아쉽네만->

그는 그 편지 또한 버렸다. 창가에는 어선에서 사용하던 작은 발사기가 놓여 있었다. 섬광탄을 넣고 그 레버를 당기기 전에,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책상 위에 두꺼운 종이가 뒤집혀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질리도록(결코 질리지는 않았지만) 본 종이였다. 저런 종이가 보일라치면, 작고 가느다란 그 손은 어김없이 얼마 없는 크레용 몇 개를 쥐고 끝없는 상상의 세계를 구현하곤 했다. 역병이 없는 시대, 자기 어머니가 살아있던 시대, 꽃이 만발한 봄의 던월, 사람들이 한가롭게 낮잠을 자는 던월, 듣기만 했지 직접 가본 적 없는 서코노스의 바다. 그는 검붉게 변색된 커다란 반점이 남아있는 그 종이를 뒤집었다. 그날따라 어딘지 모르게 창백하고 힘겨워 보였고, 먼저 쉬겠다며 다락방 위로 비틀대며 올라간 남자에게 자랑하기 위해 서둘러 그린 그 그림은 평소보다 조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애정과 정성이 듬뿍 가득한 그 그림에는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턱까지 오는 길고 까만 머리에 크고 유들유들해 보이는 눈을 하고, 귀까지 걸린 미소를 한 채로 탑 위에 우뚝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크레용을 다 써버렸는지 하늘은 절반도 칠해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남은 절반은 피로 흠뻑 젖어서 아주 기괴하게 색이 칠해져 있었다. 그 그림의 꼭대기에는 큼지막하게 “아빠”라고 적혀져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그 글귀와 그림을 감상하면서도 웃지 않았다.

코르보는 그림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거칠게 레버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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