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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아너드

(단편)왕국 위에서

<까마귀 이야기>와는 내용 면에서 무관한 단편입니다.

 



서코노스가 척박한 땅이라는 것은 약간의 식견만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나라는 염수를 피해 개간한 내륙의 비옥한 농토 일부를 제외하면 태반이 험한 산과 바위투성이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서코노스에서 넉넉한 마당이 딸릴 집터를 찾느니, 포도밭에 포도알이 몇 개 달려있는지 세는 시간이 더 적게 걸릴 거다’라고 말할 지경이었고, 우습게도 그 말에 반대하는 이들 또한 드물었다. 바다도 예외는 아니어서 복잡한 해류와 거친 파도가 해안가를 따라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서코노스의 명물인 바다는 그 우아한 에메랄드 빛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 동안 들어온 칭송을 곱게 모아 놓는다면 작은 둔덕을 이룰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여행으로 잠시 이 섬나라를 방문하는 외지인들의 이야기일 뿐이었고, 서코노스 사람들은 이 바다의 포악하기 그지없는 본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서코노스의 바다는 육지를 깎아먹지 못해 아주 안달이 나 있었고, 틈만 나면 바위골짜기를 탐하는 데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서코노스의 해변은 언제나 바다에게 유린당한 바위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바닷가 사람들의 발바닥이 소가죽처럼 거칠고 질긴 것은 그것 때문이다. 한편 어떤 파도는 바위를 자갈로 쪼개는 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자갈들마저 흰 모래로 조각조각 쪼개놓기도 했다. 그래서 이 나라의 해변 중 일부는 대부분 자갈투성이의 해변이면서도, 간혹 하얀 모래사장을 갖고 있기도 했다. 암반이 바위덩어리가 되고, 그 바위가 돌과 자갈을 거쳐 모래가 되기까지는 까마득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모래는 이 대지의 자식들의 계보 중에서 으뜸가는 연배를 자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카르나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길이가 백여미터를 좀 넘는 아주 자그마한 해변이 있었다.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새가 날개로 감싼 것처럼, 해변은 위에서 보면 절벽에 오목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게다가 이 해변에 발끝이라도 디디려는 사람은 여지없이, 산길이라고는 작은 짐승의 발자국 뿐인 산을 한바탕 올라야 했다. 게다가 막상 간신히 도착하면, 자갈과 잡초, 파도에 쓸려온 해초로 뒤덮여 한 눈에도 지저분한 해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었고, 최근에는 아예 두 다리로 선 동물은 아무도 방문하지 않았다. 만일 이 바닷가를 주의깊게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다와 땅이 만나는 경계선에 희고 가느다란 모래사장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미새의 날개에 기세가 죽어서 잔잔해진 물결은 그 윤곽을 느긋하게 흐트러뜨리곤 했다. 그것은 제국의 어린 황제가 좋아하는 자신의  흰 담요를 끌고 간 자국처럼 가느다랗고 보잘것없어, 아주 가까이서 보지 않는다면 흰 모래는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이곳은 아주 조용했다. 이 해변의 정적을 정기적으로 깨는 것은 조용한 파도소리뿐이어서 귀를 기울이면 조개가 제 아가리를 놀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코르보는 그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의 색이 쌍둥이처럼 닮아, 꼭 거울같아 보이는 맑은 날이었다. 세간에서 칭송해 마지않는 서코노스 특유의 날씨였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누르스름한 모래 한 가운데에서 오직 코르보만이 검은 색이었고,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코르보가 지나간 자리에는 큼지막한 발자국이 남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가 그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면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애당초 누군가가 방문한 적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따금 바닷물이 그의 발치까지 다가와 혀를 날름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어린아이처럼 알짱대는 파도를 발로 살짝 걷어찼다. 부츠가 금새 모래로 지저분해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큰 자갈이 눈에 들어오면 골라내어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30년에서 20년쯤 전인가, 그 해변을 홀로 뛰놀았던 소년과 꼭 닮은 행동거지였다. 여느 아이들처럼 물장구를 치거나 수평선에 대고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 나름의 방식으로 바다에 몰입했던 아이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장난을 치면서도 시종일관 코르보는 무표정했다. 그의 앞에서는 그 소년이 달려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한참을 그러는데도 그를 방해하는 이는 없었다. 어차피 한 뼘 폭의 모래사장에 해초 찌꺼기와 돌자갈 투성이인 볼품없는 곳이니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가 다르게 서코노스가 시멘트와 벽돌의 숲을 늘려가는 와중에서, 이곳만은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

“휴가요?”

에밀리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20여년 간의 종사 이래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에밀리의 허가를 기다렸다. 집무실에 둘만이 남았을 때 코르보가 꺼낸 첫마디에 놀란 나머지, 에밀리는 ‘휴가’의 사전적 정의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서코노스로.”

결과부터 말하자면, 코르보는 지금 고향의 바다 곁을 산책하고 있었다. 물론 에밀리가 처음부터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위험하다면서, 혼자 있기 싫다면서 떠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코르보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에밀리는 이제 예전과 같은 꼬마 숙녀가 아니었기에 그런 코르보를 꺾으려 떼를 쓰지 않았다. 그저 호국경을 가느다란 팔로 끌어안으면서 약간의 미련을 내보일 따름이었다. 코르보 또한 에밀리를 쓰다듬고 머리를 손으로 빗어 주면서 화답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코르보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몇 년 전 서코노스에 한 번 오기도 했지만, 그곳은 자신의 고향과는 떨어진 곳이라서 던월처럼 이질적이었다. 무엇보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그 때의 방문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가 바라지 마지않던 귀향은 실로 20여년만인 셈이다.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나마 대부분의 사건들은 무사히 해결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다. 아무리 조용히 지나간 바람도 그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어쩌다가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면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예전에 심하게 고문당한 흉터는 지금도 소금기 머금은 바람만 맞으면 날카로운 통증을 일으켰다. 던월에서는 에밀리를 위해 얼굴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있었지만, 이곳의 바람은 던월과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

간혹 코르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금새들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신들의 민망함을 감추기 위함인지, 여전히 의혹을 지우지 못해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6개월간 고국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코르보는 뒤늦게야 알았다. 서코노스 출신이자 최초의 평민 호국경이 치졸한 여제 살해범으로 전락하면서 최남단의 국가는 발칵 뒤집혔다. 졸지에 국가 차원에서 변명하는 일이 벌어졌다. 서코노스는 제국의 연합을 뒤흔들 생각이 추호만큼도 없으며, 어디까지나 이번 비극적인 사태는 저 호국경 개인의 문제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출신을 문제로 삼았다. 제대로 된 가족도 없었기에 교양인이 될 가능성이라고는 발끝 때만큼도 없고, 자연 저 본성 역시 천박했으리라고 말이다. 다음에는 성격을 거론하고 나섰다. 여느 서코노스 인과 딜리 익살도 모르고 과묵한데다가, 속내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호국경이다. 필시 그 안에는 죄악의 인자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그들은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호국경을 가장 열심히 공격한 국가는 서코노스였다. 안그래도 해적의 노략질로 평판이 실추된 차에, 호국경 문제마저 겹치면 교역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 뻔했다. 서코노스의 자랑이 서코노스의 망신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

코르보는 기둥 뿌리까지 불타버린 집터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쓸만한 세간이 없긴 했지만 그들은 먼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다. 그는 그 참상을 얼마 보지도 않고 옛 집터를 떠났다. 당사자가 가고 나니 겸연쩍어하는 사람들만 그 자리에 남았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몸과 머리는 용케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동안 줄곧 가고 싶었던 곳이었으니 당연했다. 험한 산세를 거침없이 넘었다. 숨이 약간 가빠질 때가 되니 푸른 바다와 가파른 둔덕이 머리를 내밀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길목을 따라 내려가자 볼품없는 해변이 나타났다. 여전히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코르보는 자갈 위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몸을 쪼그리고,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20여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소년을 파도가 반겨주었다.

*

해변이 느닷없이 끝난 자리에는 벼랑이 버티고 서 있었다. 별수없이 코르보는 멈춰섰다. 옛날에도 소년은 이 자그마한 자신의 영토를 필요할 때마다 방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 손바닥만한 영토의 끝과 끝을 오가면서, 바깥에서 묻혀온 앙금을 씻어내려 홀로 분투했을 것이다. 험한 산 구석, 벼랑과 벼랑 사이에 끼어 바다에 닫혀버린 작은 해변. 자갈과 모래의 산은 오직 그만이 아는 비밀이다. 그가 죽으면 모두에게서 잊혀지고, 다시 기약 없는 겨울잠을 잘 볼품없는 세상이었다. 이 왕국에서 태어난 소년은 막사 속에서 느리게 자랐고, 거대한 흰 궁전에서 성년을 맞았다. 그리고 이제 소년은 중년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 그가 알던 세계는 너무나 넓어져 있었고, 이 왕국만이 알던 소년은 제국의 거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이상한 존재에게서 바라지도 않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손에 낀 장갑을 벗자 기묘한 문신이 새겨진 손등이 드러났다. 아직도 이상한 존재로부터 받은 힘은 그를 돕고 있었다.

왕국을 벗어나던 날, 소년은 무척 서러웠다. 조그마한 그의 영지가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게 지금도 기억난다. 영원한 추방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슬픈 일만 가득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연병장에서 선대 호국경을 몰아붙이고,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와중에서도 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게 언제부터였을까.

“서코노스는 모래 해변이 예쁘다는데 진짜에요? 밀가루 같은 모래들만 쌓여있어서 햇빛 반사하면 되게 화사하다고 했어요. 파티장의 샹들리에같대요.”

그림책을 한 손에 쥐고,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코르보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보다 어렸던 에밀리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있잖아요, 서코노스 사람은 전부 코르보 같은 사람들인가요? 그럼 서코노스는 엄청 조용한 나란가봐요. 그쵸?”

해변의 정적을 코르보의 맑은 웃음소리가 깨트렸다. 바람이 그의 머리를 헤집든 말든, 코르보는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상처투성이 왼손을 물에 담그고 부드러운 모래 한 줌을 떠냈다. 수백, 수천, 수만 년에 걸쳐 느리게 깎여나간 벼랑의 말로, 한없이 조그맣지만 한없이 아름다운 세월의 결정이 그 손안에 있었다.

아니란다 에밀리, 서코노스는 생각보다 척박한 곳이야. 그림책에 나오는 예쁜 초원은 거의 없어. 산 아니면 포도밭이 대부분이란다. 모래사장도 그렇게 에쁘지가 않아. 해변에는 딱딱한 자갈이 많고 모래는 갈색이거나 회색이지. 물에 젖으면 진흙처럼 지저분한 색이 될 거란다. 몸에 붙은 젖은 모래는 정말로 따가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서코노스 인들은 모두 말이 많고, 활발하고, 술과 음식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단다. 나랑 달리 춤도 잘 추고 노래들도 잘 불러. 에밀리, 네 생각과 달리 나야말로 서코노스답지 않은 사람이야.

모래를 헤집던 코르보의 손에 날카로운 것이 걸렸다. 갑작스럽게 세게 파도가 치더니, 그의 발목까지 차오르고 옷 끝자락을 가득 적셨다. 그는 생전의 여제가 한 말을 떠올렸다. 당신 뒤를 따라다니더니, 표정이 가끔씩은 당신과 똑같아지더군요. 특히 당황할 때 모습이, 정말 젊은 시절 당신과 꼭 빼닮았어요.

어릴 때는 거울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군대에 들어와서야 그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코르보는 소년 시절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알 것 같았다. 궁금할 때는 에밀리의 얼굴을 보면 되는 것이다. 모래 밖으로 빠져나온 왼손에는 조개껍데기가 들려 있었다. 그대로 몇 번 흔들자 맑은 바닷물이 들러붙어 있었던 모래를 씻어냈다. 조개껍데기는 맑은 흰 색이었다. 햇빛을 반사하니 화사하게 반짝반짝 빛났다. 코르보의 얼굴에는 실로 오랜만에, 진심에서 우러난 미소가 활짝 피어나 있었다.

다음에 올 때에는 에밀리도 데려올 것이다. 험준한 산을 타고 빽빽한 숲을 헤쳐나가야 비로소 나오는 그만의 바다, 그만의 왕국이 거기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동화 속 환상적인 해변은 아니고, 비좁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이곳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모래만이 아니었다. 다음 여름에는 반드시 에밀리의 손을 잡고 오자. 서코노스의 바다, 이 해변에 어울리는 흰 옷을 입히고서.

그리고나면, 왕국의 비밀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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