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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아너드

까마귀 이야기 - 3화

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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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는 고요한 침묵으로 휩싸여 있었다.
부드럽게 일렁이다가도 보트가 다가오면 이내 뱃전을 두들기는 파도 소리, 바다 위를 떠다니는 부표들의 가느다란 마찰음. 그리고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보트의 엔진음까지. 운이 좋으면 뱃사람들은 저 먼발치에서 고래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뱃사공 새뮤얼에게 있어 일상이란, 항상 그런 바다의 소리와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바다란 그만의 세계였고, 바다의 소리는 항해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음악이었다. 바다 밑에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기에, 뱃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몹시 재수없게 여기곤 했다. 그러나 육지에서 잠을 잘 수 없게 된 늙은 뱃사공에게 있어, 바다의 소리는 안온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뱃사람들이 새뮤얼을 '괴짜 늙은이'라고 부르는 이유였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새뮤얼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강한 불안함에 휩싸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바다라니, 이것은 좋지 않은 징조다. 늙은 뱃사공은 헛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램프를 켜고, 사방을 비추어 본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다.

"이런 불을 갖고 바다를 비추려고 하다니, 나도 참 멍청한 짓을..."

바다의 소리에도, 그 진동에도 익숙해진 그였지만, 밤바다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에는 여전히 적응할 수 없었다. 어둠이란 곧 미지였다.

아주 옛날, 새뮤얼이 아직 햇병아리 해군이던 시절, 그는 자신의 상사에게서 바다에 대한 전설을 들은 적이 있었다. 늦은 밤이면 그 상사는 어김없이 입에서 값싼 포도주 냄새를 풍기면서 나타났고, 부하들에게 밤바다를 조심해야 한다고 귀딱지가 앉도록 말하곤 했다. 그의 상사는 고래기름을 사용한 함선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부터 배를 탄 베테랑이었고, 두 번의 좌초와 표류를 겪은 적이 있는 생존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 자는 자신의 생존력을 항상 자랑거리로 여겼고, 술집에서 허풍을 떠벌리는 소재로 간간히 이용하곤 했다. 그러나 풍랑이 심할 때 그는 어김없이 손을 심하게 떨었고, 술을 심하게 찾았다. 그 역시도 사람이라고 젊은 시절의 새뮤얼은 생각했다.

"만약에, 밤바다에서 말야...검은 눈을 본다면 말야? 그땐 무조건 도망쳐야 해. 알겠어? 그 검은 눈은 말이지, 저승으로 가는 눈이라고. 낮에는 밝으니까 지가 눈에 잘 뜨일거 아냐? 그래서 밤에 어둠을 틈타서...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거지! 그러다가 좀 호구같은 놈이 보인다....싶으면 그 시꺼먼 눈깔로 저놈이 만만한가 아닌가를 관찰하는거야. 만약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도망간다면 그날은 뭐...너흰 목숨 건지는 셈이야. 만약 니들이 계집애들처럼 꺅꺅거리면서 떨기만 한다면...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리고 목소리를 골랐다. 그의 버릇이었다.

"검은 눈의 고래가 나타나서, 너희들을 집어삼켜버리겠지. 그놈은 집채만한 놈이야. 크기하나는 끝내줘서, 우리가 탄 배는 꼬릿짓 한번으로 산산조각 내 버릴거라고. 그리고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걸 꿀꺽!! 삼키면 삼키는 대로 곧바로 저승길로 끌고간다? 그 저승은 말야, 밑도 끝도 없는데다가, 그 고래가 집어삼킨 집이며, 배며, 길이며, 요람에 침대, 마차...그런 것들이 둥둥 떠다니는 곳이야. 신이 돕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곳이야. 한번 들어가면 굶어뒈지든 미쳐서 목을 메달든, 하여간 뒈질 때까지 나갈 수 없는 사람의 무덤이라고."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뮤얼은 상사의 말에서 나온 거대한 고래를 본 적이 있었다. 아니, 본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허깨비일지도 몰랐다. 장시간의 피로와 허탈감이 상사의 망상어린 술주정과 뒤섞여서 나타난 하나의 허깨비. 인간은 수천년 동안 애써 장대한 건물을 쌓아오며, 자신들의 위업과 역사를 세계에 자랑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괴물은 존재 자체로 그 노력을 비웃었고, 피로에 지쳐 있었던 새뮤얼의 의지를 남김없이 짓뭉개고 끝간데 없는 공포를 맛보게 했다. 그러나 상사의 말과 달리 그 무언가는 그를 해치지 않았고, 바다의 심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지금도 새뮤얼은 그것의 정체가 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때, 자신은 상사의 충고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도망갔기에 무사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는 아직도 사람의 무덤이 아닌, 산 자들의 바다 위 조각배에 앉아 숨을 쉬고 있는걸까?

사람의 무덤. 한번 들어간 자들은 나올 수 없는 무간지옥의 세계. 그런 세계를 만든 신이, 과연 불행한 미아들에게 선심을 써줄까? 오히려 절망에 빠진 그들의 추태를 구경하기 위해 무대의 뒷편에서 희희낙락 구경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새뮤얼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성냥불의 희미한 빛에 이끌려, 캄캄했던 뱃전이 잠시 환해진다. 그리고 밧줄과 방석, 담요, 신호탄같은 자질구레한 물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고,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것 역시 어김없이 그의 눈 속으로 파고든다. 무거운 것이 들어 있는 커다란 자루다. 아마 술집에서 밀수를 할 때 애용되었던 것이리라. 몇 번을 사용해서 이미 낡을대로 낡아버린 자루에는 거무스름한 얼룩이 심하게 묻어 있었다. 누가 보면 밀조한 술이나 역청이 새어나온 것으로 착각하겠지. 그렇지만 새뮤얼은 그 얼룩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내용물도.
새뮤얼은 담배를 몇 번 신경질적으로 빨고 나서, 곧바로 바다에 던져버렸다. 잠시 치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마치 자신을 겁주던 그 상사처럼, 새뮤얼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아무 빛도 없는 곳. 스스로와 마주치기를 두려워했던 새뮤얼은 어두운 밤바다 한가운데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며칠 간 있었던 일들이, 그리고 한 나절 전에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수치심과 분노, 자괴감이 그를 좀먹는다. 바다는 넓지. 사람 하나 정도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땅을 밟고 있는 동안 있었던 쓰라린 기억이나 경험 역시, 바다의 공포와 지속적으로 마주한다면 깨끗하게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는.

"망할!"

늙은 뱃사공은 노성을 지른다.

"맙소사,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그는 떨리는 손으로 램프를 다시 켜고, 부대자루를 비춘다. 쓰라린 기억을 깨끗하게 지울 수 있다고? 당치도 않은 소리!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제독의 손에 이끌려 술집에 찾아온 것을. 제독의 기묘한 제안에 이끌려 그는 콜드브릿지 감옥 인근에 위치한 하수로로 향했고, 한 남자와 만났다. 제독의 설명대로 자기보다 훨씬 젊은 그 남자는 몹시나 피곤하고 초췌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검고 긴 새옷도 그 남자의 얼굴에 서린 음침한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새뮤얼은 일찍이 그런 어둠이 서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죽음, 상처, 피로, 증오, 복수, 갈망, 애정, 환희. 6개월 만에 눈부신 해를 본 남자의 표정은 경험많은 늙은이조차도 곤혹스러워할 그런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남자는 제국의 역병을 몰아낼 것이다. 실종된 여제의 여식을 되찾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제국의 질서를 되찾고, 사람들의 어수선한 일상을 되돌려놓을 열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새뮤얼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제독에게 실망하면서도 그의 명령에 따랐다. 만약 악역이 있다면, 그 악역을 해치우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제독 대신 기꺼이 손에 피를 묻혀줄 던월의 검이었다. 수도의 혼돈에 이골이 날대로 난 뱃사공은 제독의 설득에 넘어갔고, 그 과묵한 남자를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그 남자에게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누명이라고는 하지만, 여제 암살의 의혹을 가진 자였다. 그리고 첫 만남에서 그의 표정에서 본 것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기란 더더욱 힘들었다. 감옥에서 무슨 짓을 당했길래, 어떤 극한의 세상을 맛보았길래 저 남자는 젊은 나이에도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건가? 저 손에 쥐어진 검이, 과연 복수의 대상들에게만 향할까? 혹시 피에 취한 그 남자는 잠든 자신들의 목에다가 그 검을 들이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알 수 없었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불과 며칠 동안의 짧은 동행이었지만, 남자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는 서서히 달라져 가고 있었다. 여제의 죽음. 소녀의 납치. 불명예의 낙인을 짊어진 자. 그 남자는 자신의 분노를 조용히 억누르고 놀라울 정도로 적들에게 자비로운 복수를 행하고 있었다.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호국경으로서, 던월을 감시하고 시민들에게 횡포를 일삼는 군인들에게 피의 철퇴를 내릴 법 했건만, 그 남자는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최대한 피했다. 던월 곳곳에 붙어 있었던 남자의 수배서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그 대신 무시무시한 해골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악한의 수배서가 벽을 덮기 시작했다. 그 불명예가 광명의 날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황녀를 마침내 구출한 남자의 모습을. 선대 여제의 뒤를 잇기에는 너무나 어려 보이던 그 소녀는, 남자의 품 안에 안겨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얌전히 있었다. 소녀의 수다에 의하면, <황금 고양이>에서 도망친 소녀는 남자보다 먼저 새뮤얼에게 갈 참이었지만 병사들에게 들켜 그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병사들이 소리를 질러 연락을 하기 전에, 그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가슴에 박힌 수면 화살을 맞고 신음했다. 마치 바람처럼 나타난 그 남자는 병사의 손을 소녀의 손목에서 억지로 떼어냈고, 그녀를 조용히 끌어안은 다음 바람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이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새뮤얼의 앞에 순간이동이라도 하듯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제서야 새뮤얼은 남자의 왼손에 박힌 선명한 이교의 문신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제물을 요구하고, 변덕스러운 기분에 따라 인간을 손아귀에 쥐고 논다는 이교도의 신, 방관자를 떠올렸다. 호국경이라는 그 남자는 이단자였다.
그렇지만 새뮤얼은 남자의 가면 밑에 가려진 따뜻함에, 소녀를 대하는 온화함에 "무시무시한 신의 축복 아래 흑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이단자"에 대한 전설을 좀처럼 떠올릴 수 없었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지금 상황에서 과분하리만큼 자비로운 이 남자가, 이단자라고? 마법에 교만해하지 않고, 자신을 철저히 죽이고, 오로지 저 가녀린 소녀만을 위해 피를 뿌리고 다니는 저 남자에게서 이상하게도 새뮤얼은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야심한 밤 제독을 만났을 때에도, 그 남자의 왼손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남자는 믿을 만한 존재였다. 계산되지 않은 순수함. 분노를 억누르는 강인한 통제력. 제독의 검으로 사용되기에는 과분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새뮤얼은 그 남자가 언젠가 폭발하지 않을지 두려웠다. 오랜 경험을 통해, 뱃사공은 인간의 감정이라는게 유리잔의 물을 쏟아버리는 것처럼 쉽게 없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려온 자라도, 그 유리잔에 괴어 있는 감정을 손쉽게 비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마치 유리잔에는 물이 한가득 차 있지만 여전히 물은 한방울 한방울 잔 속으로 떨어지고 있고, 그것을 가슴졸이면서 바라보는 형국이었다. 마침내 유리잔이 넘치는 마지막 순간, 저 남자는 어떻게 될까. 아니, 유리잔에 담겨 있는 저 액체는 물이기나 할까? 오히려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온 세상을 중독시킬 그런 치명적인 독극물이 아닐까? 남자가 호국경의 가면을 벗고 기분나쁜 해골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는 순간, 그리고 복수 대상에게 응징을 가하는 그 순간, 얼굴 밑의 얼굴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새뮤얼은 그저 남자가 황녀와 함께 있을 때의 부드러운 표정이 그의 진정한 얼굴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남자는 소녀 앞에서만큼은 고뇌와 피로를 잊을 수 있었고, 소녀는 남자 앞에서만큼은 어미를 잃은 고통과 악몽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래서 새뮤얼은 남몰래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남자가 잠든 사이, 새뮤얼은 소녀에게 물길의 유용함과 위험함에 대해, 바람을 읽는 법에 대해 최선을 다해 가르치면서 그의 불안을 남몰래 눅였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손 안에 들어온 한 유리병을. 남자가 피로에 지친 몸을 침대에 뉘이고, 다락방에서 홀로 그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무렵, 그는 어떤 잔혹한 거래에 끌어들여졌다. 그에게 선택권따윈 없었다. 일은 아주 간단했다. 그 유리병의 내용물을, 어떤 술잔에다가 쏟아붓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것을 마시면, 그 사람을 바다 한가운데로 데려가 처리하면 그걸로 모든 것은 끝날 터였다. 그리고 자신은 술집으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돌아와, 다시 모두의 앞에서 괴팍한 노인네의 행세를 하면서, 남자가 사라졌음을 소녀에게 알리고, 소녀가 여제가 되는 것을 지켜보고, 약간의 보수를 받아 다시 바다로 떠나면 될 터였다.

"그렇지만 제독님, 이건 너무하..."
"명령일세, 새뮤얼."
"아니,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독님. 아무리 그래도 말입니다, 저 분은 "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 들지 말게. 한번 뿐일세."
"그냥 그리스톨 밖으로 추방한다거나 하는 건 안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 분은 서코..."
"새뮤얼 씨."
"남작님."
"그냥 하십시오. 해블락은 인내심이 많지 않다는건 당신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저 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잠자코 하십시오. 당신의 목숨은 보증하겠습니다. 아니, 일이 끝나면 저희 가문에서 약간의 보수를 드리도록 하죠. 물론 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다는 하에서 말입니다."
"......"
"대답하게, 새뮤얼."
"...알겠습니다."
"좋아."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항상 정의롭지는 않았지만 악한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의 일탈도 즐겼지만 질서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은 옳고, 악은 그르다. 비록 상황에 따라 지킬 수는 없게 되더라도, 이 경구만은 언제나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독병을 기울이는 순간, 새뮤얼은 마음 속 어딘가가 칼로 후비듯 고통스러워졌다. 해서는 안돼. 이건 저 남자를 배신하는 짓이야. 그렇지만 그는 살고 싶었다. 저 남자는 항상 그에게 부드러운 표정을 보였지만, 해블락은 언제라도 방아쇠를 그의 등에 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새뮤얼은 독을 부었다. 반을 넣었을 무렵, 그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독을 바다에 따라 버렸다. 어째서 그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덜 중해지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렇지만 어쩌면 독이 덜 들을 수도 있었다. 그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던월 탑의 경비를 뚫고 첩보대장의 목을 비틀어버린 남자가 돌아왔을 때, 그는 피곤하고 귀찮아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했다.

"모두들 바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다들 잔을 들고 당신 이름을 외치고 있겠죠. 가 보십시오."

남자는 가면을 벗고,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불명예를 걸머지운 모든 것을 해치웠음에도, 그의 웃음에는 어딘지 슬픈 데가 있었다. 새뮤얼은 티비아 산 독이 깨끗하고 빠르게, 그리고 덜 고통스럽게 저 남자의 목숨을 끊기를 바랐다.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그의 목숨줄을 끊어놓기에는 불충분하기를 빌었다. 전자라면 적어도 저 남자에게는 덜 잔혹한 최후가 될 것이고, 후자라면 그를 바다 한가운데로 데려가 제독의 눈을 속인 다음 몰래 다른 곳으로 보내리라. 정말로 치졸하기 그지없는 바람이라고 새뮤얼은 자조했다. 차라리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저 남자에게 곧바로 총을 쏘는 편이 더 나을 듯 싶었다. 그렇지만 자기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겠지. 저 남자는 술집으로 들어가, 리디아와 월레스, 월레스에게 혼나는 세실리아, 말싸움을 벌이는 소콜로프와 피에로, 자신의 학생을 지켜보는 칼리스타와 그림을 그리고 있을 황녀, 그리고 남자의 영예로운 귀환을 기다리는 세 명의 왕당파들. 저 복작거리는 단란한 땅 위는 자신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자신이 있을 곳은 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보트의 위, 사람을 쉽게 집어삼키는 바다의 위인 것이었다. 이것이 이 비겁한 뱃사공에게 가장 적당한 자리였다.

자, 불명예한 축배의 시간이다.

쓰라린 기억따윈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걸 지우려고 노력할 때마다, 그 기억은 어김없이 날카로운 칼날을 세워 그 손을 더더욱 상처입히겠지.
그는 기억하고 있다. 남자의 최후의 순간을 생생하게. 독은 그의 생명을 끊어놓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쓰러진 남자. 그의 신경은 하나하나가 마비되어 몸을 지탱하지도 못했다. 새뮤얼은 벌컥벌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세 명의 높으신 분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독이 좀 느리게 듣는 모양이지만, 곧 죽게 될 겁니다. 그들은 수긍하고 뒷처리를 그에게 남기고, 문 밖으로 나가려 했다.

"코르보."

소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

이제 그만 갈 시간이다.
새뮤얼은 부대자루를 뱃머리를 향해 잡아 당겼다. 무게중심이 쏠리면서 보트가 살짝 기우뚱거렸지만, 이 정도로 뒤집히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부대자루의 끝을 수면에 살짝 담갔다. 저쪽이 머리였던가? 아니 다리였나? 확실하지 않았다. 비명과 울부짖음이 들리고, 칼리스타의 불타는 듯 노려보는 눈동자, 손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던 소녀, 총을 든 손을 떨던 해블락, 당황한 표정의 펜들턴과 마틴, 그리고 바닥에 피와 두개골 조각을 퍼트리며 죽은 남자.

"부디 절 용서해 주십쇼...아니, 용서하지 마십시오."

새뮤얼은 경황없이 자루에 남자를 밀어넣었다. 소녀의 손가락은 끝까지 남자의 손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소녀의 손을 떼어냈다. 남자의 손은 아직 따뜻했다. 칼리스타는 그를 노려본다. 그 눈에는 분노와 격앙으로 가득 차 있다. 조용했던 여자의 눈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격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당장이라도 그를 밀쳐낼 것만 같았다. 새뮤얼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루를 동여맨다. 남자의 반쯤 뜨여 있는 눈과 마주친 순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해블락은 총을 그녀에게 겨누고, 뱃사공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거칠게 남자가 든 자루를 계단 밑으로 질질 끌고 내려갔다. 리디아는 넋나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월레스는 아직도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눈치였다. 절름발이처럼 새뮤얼은 몇 번이고 발을 헛디뎠다. 괴짜 과학자 두 사람은 먼발치에서 그 추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남긴 편지를, 탑 창가에 놓은 편지를 제발 칼리스타가 보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인의 교단의 신이든, 바다에 사는 정령이든, 저 먼 판디시아의 악령이든, 장난꾸러기 방관자든 아무라도 좋았다. 어쨌든 누군가가 기적을 일으켜서, 칼리스타가 그것을 보게 해야 했다. 자신을 비난하는 듯하던 망자의 푸른 눈이 아직도 어른거렸다.

새뮤얼은 손을 놓았다. 바다속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가 끌어당기기라도 한 듯, 자루는 쉽게 가라앉았다. 몇 개의 물거품만을 남기고, 그것은 어두운 심연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이제 정말로 끝이다. 이제 도망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저는 결국 늙은 뱃사공에 지나지 않더군요."

도망칠 수는 없었다. 칼리스타가 편지를 읽게 된다면, 그리고 그의 불가능한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하운즈 핏' 선술집 옆에 위치한 낡은 탑에서는 작은 대포음이 울릴 것이다.
그 때에는, 정말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그곳으로 돌아가리라. 이제 그는 목숨을 기꺼이 걸 수 있었다.

"당신처럼 강하지 못했습니다. 마법도 없었습니다. 제독이 무서웠습니다. 의지할 곳 없는 비천한 신세지만, 이 알량한 목숨이나마 보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남자가 흑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그와 소녀, 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어쩌면 그 마법이 그를 되살려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그렇다면 이 참극을 되돌리고, 저 불쌍한 소녀를 다시 되찾을 방법이 생겨날 지도 모르지.
미련하게도 그는 아직도 던월에 질서가 되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지독히도 맛없지만 가끔씩 생각나는 장어 요리, 티비아 산 독한 포도주, 아침마다 골목골목에 스며드는 빵굽는 냄새. 어수선한 표정의 학생들, 아이들을 소리쳐 부르는 어머니, 오늘도 지겨운 하루가 시작되었다면서 투덜거리는 고래 도살자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그리웠다. 남자가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이제 해블락은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의 검은 이제 그의 심장으로 향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코르보 씨."

물론 그 유리잔이 넘쳐흐르지 않았다면, 그 안에 담겨 있을 썩은 감정이, 억눌러둔 분노가, 일그러진 증오가 그 남자를 골수 속까지 중독시키지 않았다면 말이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 며칠동안 얼마나 사과를 해왔던가. 이틀이었던가, 사흘이었던가? 군인들의 눈을 피해 던월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그는 틈틈히 자신의 과오로 필요 이상의 고통을 겪은 남자에게 사과하기를 잊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하는 새뮤얼 비치워스를, 남자는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면 밑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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