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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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드, 나의 오랜 친구. 여전히 고뇌하고 있는가?
검에 배어있는 피, 그리고 손에 깊숙히 물들어버린 피냄새. 그것들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게 그토록 고통스러운가? 너의 손 끝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살육의 길들이 아직도 괴로움을 안겨주나?
다우드. 나의 친구여. 너의 손은 한때 피를 묻히는 손이었다. 갱단, 상인, 귀족...명칭은 중요하지 않아. 던월의 검으로서, 고래잡이의 수장으로서, 돈을 위해서이든, 부패한 족속을 처단한다는 정의감이든, 목적이나 동기 역시 상관없다. 너의 한 발은 죽음에 걸쳐져 있고, 또 다른 한 발은 삶에 걸쳐져 있지. 그토록 갈망하며, 여기저기에 묻힌 채로 잠들어가는 나의 성지를 방문하면서 받은 마법, 그리고 그것이 깃든 왼손은 너의 정의와 세상을 구현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나? 발자국마다 점점히 남아있는 핏자국들은 흘릴 가치가 충분한 것이었나?
다우드, 다우드. 나는 너를 동정하지 않는다. 경멸하지도 않는다. 나는 언제나 관조할 뿐이다. 너희들이 몸을 담고 있는 세계가 아닌 공허 속에서, 나는 만인의 생과 사를 그저 지켜볼 뿐이지. 한 아이가 탄생하는 순간 만인은 기쁨을 빚어내고 눈물로 축하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있어 너희들이 숨쉬는 것 만큼 짧고 하찮은 순간에 지나지 않아. 한 노인이 죽음을 맞으면 만인은 슬픔과 눈물을 그에게 선사하지만, 그것 역시 나에게는 한 순간의 호흡처럼 사소하고 자연스러운 순간일 뿐이지. 나의 한 손은 생명 속에, 또다른 손은 죽음 속에 담겨져 있다. 나의 눈은 과거를 응시하고, 귀는 현재를 들으며, 입은 미래를 말한다. 무한한 공허 속에서 무한한 삶과 죽음을 목격하고 부여하는 나이기에, 이 모든것은 지극히 무의미하고 가끔씩은 그 권태의 갈증을 달랠 무언가를 원하게 되지. 다우드. 아까 말했듯이, 난 너에게 동정과 경멸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너와 같은 자들을 통해 잠시나마 즐거움을 느끼지.
죄책감을 느끼는가? 여제의 몸에 검을 박아넣는 그 순간이 아직도 그 꿈 속에 어른거리나? 황녀를 지키려 애쓰던 어미의 몸짓, 죽음의 임박을 감지한 순간 깨진 여제의 가면 밑에는 한 사람의 겁에 질린 인간만이 있었지. 너는 수많은 인간들에게 가차없는 죽음을 내려왔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 여제의 눈 너머에서 무언가를 본 너는 유능한 암살자의 모습에서 인간으로 잠시 돌아왔고, 그 망설임은 여제의 목숨을 깨끗하게 끊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대섭정의 명령을 수행한 뒤 황녀를 납치하고 사라지면서도, 너는 그녀의 죽음 앞에 무력했던 호국경의 얼굴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지. 지금도 그의 얼굴을 기억해내고 있군. '호국경'이라는 존귀한 명칭에 걸맞지 못하던 그 사내. 여제와 너처럼, 그 역시 그 순간에는 호국경이 아닌 한 사람의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눈 앞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강인했던 무력조차도 일시에 상실하고, 이윽고 경악, 공포, 무력감에 절망하던 그 사내를 기억하나? 너는 그가 얼뜨기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지. 서둘러 모습을 감춘 너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다우드. 그 남자의 표정을. 자신의 부상은 상관없이, 죽어가는 여제의 곁으로 기어가 필사적으로 상처를 막던 그 모습을. 너의 검 실력은 실로 정확했다. 남자의 손힘조차도 그 출혈을 막지 못했지. 비통함으로 가득 찬 그 표정과,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에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하고, 가슴 속에서 불타오르는 울분에 눈물조차도 말라버렸던 남자를 기억하나? 그는 여제가 힘겹게 유언을 남기는 순간에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섭정과 고위 주시자의 검을 맞고 기절하는 그 순간까지도 변명 하나 하지 못했다. 재미있는 것을 알려주마. 그때 그 순간, 남자가 자책했던 것은 남자 그 자신뿐이었다. 여제의 몸뚱아리에 검을 박아넣은 너 역시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그것 이상으로 검을 너무 이르게 집어넣은 자신을, 총알을 재장전해두지 않았던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저주의 대상이자 혐오의 대상이었다. 정말 흥미로운 남자였다. 이전부터 그랬지만, 앞으로도 당분간은 내 흥미를 끌겠지.
너에게 있어서 지난 반 년은 광명을 찾아 헤매는 시절이었다, 다우드. 속죄를 원했는가? 대섭정의 농간에 속아 넘어가 여제를 죽이고, 던월의 역병을 방치하고, 제국의 혼돈을 가속시킨 진정한 악당 다우드의 오명을 씻어버리고 싶었겠지. 어머니와 호국경을 찾으면서 우는 소녀의 손을 낚아채어 귀족들의 손에 넘겨줬을 때의 죄책감을 던월의 검은 극복해내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부하의 배신과 불신을 무릅쓰면서도 너는 이 혼돈을 일단락시키기 위해 노력했지. 그리고 그 결과가...저 브리그모어의 영지에서 벌어진 하나의 희극이었다. 빌리 러크의 배신을 용서하고, 그녀를 추방했다. 그리고 딜라일라를 공허 속에 봉인한 뒤 그 마녀에게 무한하게 계속될 굴욕과 인내의 벌을 내렸다. 정말 너답지 않은 일이야. 18년 전, 너는 강한 힘을 찾아헤맨 끝에 나와 만났다. 그 때 야망과 투지, 욕망으로 불타오르던 청년은 어디 갔는가?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암살자 다우드가 아닌 고해자이자 순례자 다우드로군. 이제 와서 '돈'과 '비틀어진 정의'를 방패삼아 살육해온 수많은 인간들에 대해 속죄하는 대신, 한 여자의 죽음과 소녀의 절규를 계기로 삼아 지금까지의 행보를 전부 되갚으려는 건가? 암살자로서 던월의 뒷골목에 숨어온 어둠의 18년 간, 인간의 가치는 동등하지 못하며 수십 명도 넘는 생명들보다 두 사람의 연약한 생명이 훨씬 존귀하다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군. 속죄가 가능하다고 보나? 너는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겠지. 제국은 너무 먼 길을 오고 말았다. 역병, 부패한 관리와 귀족, 인간들의 불신, 쥐떼, 흑마법. 모든 것은 착실히 끝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 결과를 불러온 자신에게 두 사람 몫의 생명이 세상을 다르게 할 수 없으리라고 체념을 하고 있는거지. 그러면서도 너는 한 줄기의 가지에 매달려 그럴리가 없다면서, 어떻게든 할 수 있다면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 그렇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아. 다우드. 인간은 원래부터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기약이 있든 없든 희망을 품는 존재인 것이다. 특히 너의 희망은 너무나도 허황된, 현실보다는 마법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희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지. 그래서 이전의 모습과 완전히 변해버린 너의 지금조차도 나의 즐거움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 남자의 이야기를 잠깐 하도록 하자.
그 남자에게 있어서 지난 반 년은 낙인과 고통의 시기였다. 여제 암살자. 제국의 배신자. 이방인 출신 버러지. 서코노스의 망신. 배은망덕한 천민. 불명예한 자, 코르보 아타노. 너와 마찬가지로 여제의 죽음과 소녀의 비명이 그에게 재미있는 변화를 일으킨 것일지도 모르겠군. 6개월 동안 저 콜드브릿지 감옥에서 부패해간 남자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가? 강요된 책무와 순진함 위에 덧칠된 고결함, 인간성을 말살한 냉정함. 황제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맹목적인 충성. 호국경으로서 갖춰야 했고, 또 그가 갖추었던 이러한 덕목들은 불명예의 낙인과 동시에 그들의 손아귀에 의해 강제로 긁어내어졌다. 또한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그가 억지로 걸머지워, 자신의 일부로 융화시켰기에 그의 피부와 함께 벗겨내질 수밖에 없었지. 군인으로서의 재능으로 안겨진 호국경이라는 호칭은 반대로 군인답지 못하다는 오명으로 인해 박탈당했고, 이제 그 남자는 호국경이 아닌 한 마리의 미천한 짐승과도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 군인이 되기 전에, 그 남자는 저 골목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동전 한푼어치의 존재였다. 군인이 된 후, 그 남자는 제국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는 한 마리의 사냥개였다. 여제를 만난 이후, 그 남자는 황실을 위해서 눈알, 팔, 혀, 다리, 머리, 내장...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쳐야만 하는 그런 존재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여제는 죽었지. 이제 남자는 동전 한푼만큼의 가치도 없는, 오히려 그 죽음조차도 과분한 존재로 끌어내려졌다. 인간으로 태어나 검으로 살기를 강요당한 자는, 이제 검으로도 인간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그저 그런 사형수가 되어버리고 만 셈이지. 그런 그 남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확신시켜준 황제의 여식을 지키는 것 뿐이었다. 호국경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암살자의 가면을 쓴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여식을 지키는 데에, 호국경의 가면과 명예를 고집한다는 것은 장애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너의 바람과 달리 대섭정의 목은 네가 아닌 그 남자의 손아귀 아래에서 으스러졌지만, 그 교수(絞首)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만큼이나 여제를 암살한 자를 처단하겠다는 의지 또한 품고 있었지. 나는 요 며칠 동안 그의 선택을 지켜봐왔지만, 지난 수 천년동안 봐왔던 그 어떤 인간들의 행동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고 놀라운 것 투성이였다. 마치 다우드 너처럼 말이다. 그 자는 이렇게 착실히...자신의 목적을 관철해가고 있었지. 다우드, 그 남자와 검을 맞대고 한바탕의 도박을 벌이던 너의 꿈은 결코 너의 망상이 아니었다. 언젠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확신이었지. 너의 주제를 아는구나.
자, 그리고 그 남자는 죽었다. 자신을 도운 자들. 황녀를 교섭의 도구로 삼아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낸 자들. 그들은 자신을 도운 대가로 남자의 몸에 독을 흘려넣었고, 자신들을 영달과 명예의 길로 올려놓은 대가로 그의 머리통에 한 발의 총알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무수한 상처를 새겨가면서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건 대가로 바다에 그의 시신을 가라앉혀 버렸다. 이제 그 남자는 저 나락 아래에 있다. 영원토록 깨지 않을 꿈을 꾸면서, 평생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던 순간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헤매이고 있다. 행복한 시절에 영원토록 머무르고 싶어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머릿속의 총알이 그를 최후의 순간으로 강제로 되돌려 놓는 모양이던데.
표정이 왜 그렇지? 던월에 존재하는 그 모든 생명 중에서도 가장 또렷하고 강력한 무력을 지닌 것은 너였다. 그런 너에게 남자는 안개마냥 불확실한 공포를 안겨줬지. 그런 위협이 사라졌는 데도 어째서 그토록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나? 죄책감? 갚지 못한 빚에 대한 허탈감? 뭐, 아무래도 좋아. 그 감정이 어떤 것이든 간에, 너의 행동의 결과는 머지않아 그에 걸맞게 막을 내릴 것이다.
다우드. 나의 친구여. 먼 옛날, 너의 어미의 어미가 이 세상의 빛을 처음으로 목격하기 한참 전의 일이다. 한 인간들의 현자가 남긴 말이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자,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라'.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마음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명심할 만한 글귀인 것 같군. 광명을 찾으려면 나락으로 가라는 것이 그 현자의 말의 요지였겠지. 광명을 원하나, 다우드?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그 인간의 말을 되새겨볼 만하겠군. 수해지구에서 남쪽으로 X킬로미터, 뱃사공들을 안내하기 위해 부표가 밀집해 있는 곳 중에서,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는 고장난 부표가 있다. 수해지구 인근을 훤히 아는 너희들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
잘 있게나, 내 친구여. 아직 소동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아두는게 좋을 거다. 그 소동의 끝에 있는 것이 광명인지 아니면 다가오는 자를 집어삼키는 무저갱인지는......"
그리고 다우드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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