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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아너드

까마귀 이야기 - 1화

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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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어코 '하운즈 핏' 선술집에 돌아오고야 말았다.


어린 황녀의 눈앞에서 차가운 마룻바닥에 쓰러진지 나흘 만에, 그리고 그 소녀가 그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해블락의 그 억센 손아귀에 끌려간지 이틀 만의 일이었다.

칼리스타는 무력했다.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던 그녀는 그 남자가 독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뒷머리에 선명하게 남은 총상을 더듬으며 쓰러지는 모습을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강인했던 여제의 경호원은 며칠 동안 그를 좀먹었던 피로와 상처, 몇 방울의 독과 단단한 총알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아직도 그녀는 다락방 바닥을 물들이던 붉은 피를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검은 덩어리가 자루 속에 넣어 봉해지고, 흡사 짐덩어리처럼 질질 끌려가던 그 모습도. 그녀는 어린 황녀를 가슴에 품어 그 처참한 단말마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가정교사의 본분을 다하려 했지만, 소녀의 공허한 표정은 이미 칼리스타의 노력이 허사였음을 알리고 있었다. 비겁하게도 칼리스타는 소녀가 자신의 눈물과 가느다란 오열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종이를 주우며 칼리스타는 자신의 손 역시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숙부의 생명을 저 비열한 고위 주시자로부터 구한 이는, 뱃사공의 배에 실려 어딘가로 멀리 흘러가 버렸다. 그 남자는 강인한 모습과 달리 사람을 너무 잘 믿었던게 탈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명문가 최후의 생존자 중 하나의 명예에 고집한 것이 탈이었다. 자신이 좀 더 수다스러웠다면, 남자가 왕당파들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동안 그들이 비밀스럽게 모여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알렸다면, 조금 상황은 달라졌을까? 마치 밑도 끝도 없는 대양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증오에 가득 찬 검은 눈길로 쳐다보는 고래들한테 둘러싸여 심해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칼리스타에게 뱃사공이 몰래 황녀의 방에 남겨놓은 편지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차라리 저 무거운 바위에 짓눌려 한 조각의 핏덩어리가 되어버리더라도 지금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황녀를 위해서라도 칼리스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녀를 깨우고 말을 걸어야 했다. 황녀는 그 참극을 목격한 이후로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케이크를 먹고 싶다면서 투정부리는 모습, 수업에서 도망쳐 다니다가 남자의 손을 잡고 돌아온 말괄량이, 창밖을 바라보며 크레용을 끄적이던 꼬마 아가씨는 더 이상 없었다. 이제 그녀는 하나의 기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고래기름을 넣어야 간신히 작동하는 그런 기계 말이다. 소녀는 칼리스타가 먹여주는 음식을 간신히 소화시키면서 간신히 작동하고 있었다. 왕당파들은 그런 기계조차도 쓸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남자가 죽은 날에도, 소녀가 끌려가고 두 하인들이 참살당한 날에도 날씨는 야속할 정도로 화창했다. 그러나 해블락은 그 동안의 정을 생각해서인지, 황녀를 돌본 공을 인정해서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해치지 않았다. 한편 두 과학자는 어디론가로 도망쳤고, 하루가 지난 뒤 병사들의 방심을 틈타 자신들의 연구소를 봉쇄하고 무의미한 저항을 시작했다. 칼리스타는 두 사람의 저항을 보며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이 들고 교만하고, 음흉하기까지 한 두 과학자들의 삶에 대한 미련은 의외로 젊은 자신보다 훨씬 강했다.

'저들이 정통 계승자를 손에 넣은 이상, 우리들의 목숨도 얼마 가지 못하겠지.'

칼리스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래도 그녀는 남자가 돌아와, 자신들을 이 심연 속에서 꺼내 주기를 마음 한구석에서 바라고 있었다. 촛불 하나로 저 바다의 심연을 비추려는 것 만큼이나 무의미한 짓이었지만, 그녀는 그 촛불에라도 온 힘을 다해 매달리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 끔찍한 광경 한가운데에서 끔찍하게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다. 제발, 신이시여, 만약 정말로 있으시다면, 저에게, 희망을. 어두운 밤, 술집의 칠흑 속에 숨어든 그녀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며 그 소원을 속삭였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난 뒤, 남자는 돌아왔다.

그러나 신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정도로 자비로웠지만 자신의 소원을 비틀 정도로 짓궂었던 모양이다.

돌아온 희망은 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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