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이야기 - 9화
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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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였군.
잠깐 음성기록을 하고 있느라고 네가 온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어. 하마터면 뒤도 돌아보지 못했을 뻔 했지. 나이 탓인지 요즘 따라 한 곳에 열중하면 좀처럼 다른 소리를 못 듣는단 말야. 이쪽으로 오는 길은 조용했나? 다른 녀석들과도 마주치지는 않은 모양이던데. 흥, 안 그래도 내가 그 녀석들에게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이니까 지붕 위에서 볕이나 쬐고 있으라고 미리 말을 해뒀지. 모처럼 날씨도 좋으니 기왕이면 수해지구 바깥으로 멀리 산책이라도 나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한가? 뭐, 별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별로 궁금하지 않은 기색이지만 그래도 일단 들어두기나 해. 두 번 다시 들을 기회는 없을 테니까. 난 말이지, 어떤 남자의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아주 어리석은 남자, 경솔했던 남자, 자신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자만했던 남자, 어떤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를 말이야.
그 남자는 ‘마녀’의 아들이었어. 그 마녀가 정말로 마녀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해적선을 나포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은 것을 보면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던 건 확실해. 어쩌면 아들이 보지 못한 몸 어딘가에 방관자의 낙인이 찍혀 있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 때 남자는 마녀의 뱃속에 있을 때였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그건 내 추측을 벗어나지 못하겠지. 각설하고, 그 남자는 항상 ‘마녀의 자식’이라는 수근거림을 들으면서 자라왔다. 마녀의 자식 아니랄까봐 재능도 범상치 않은 녀석이었어. 또래 아이들과 골목에서 놀 때면, 한층 더 빠른 몸놀림과 손재주를 뽐내곤 했고 언제나 골목대장 자리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어. 그래서인지 야심 또한 만만치 않았지. 더 높게, 더 강하게. 점점 키가 크면서 남자의 시야 역시 넓어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지저분한 서코노스의 뒷골목 너머에 존재하는 더 멀고 원대한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면서, 친구들과 놀던 공터와 낡고 따뜻한 집 너머에 있는 세계 역시 보게 되었지. 먼 곳을 본 소년이 품은 최초의 감정은 뭐라고 생각해? 그건 바로 애매한 분노였어. 자신을 사생아라고 질시하던 주변 사람, 간계와 폭력 속에서 허우적대는 깡패들, 이단자를 색출하는 데에 혈안이 된 교단의 앞잡이들, 게으름과 향락에 빠져 심심하면 발 밑의 사람들로부터 단물을 빨아먹는 귀족들까지, 그 녀석에게는 모든 것이 적이자 타도해야 할 대상과 다름없었다. 그가 본 새로운 세상이란 배를 채우려면 제 새끼 머리조차도 물어뜯을 들짐승처럼 보였어.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부풀었던 그 야망은 들짐승의 횡포를 제 손으로 어떻게든 하겠다는 치기마저 불러일으켰지.
16살이 되던 해, 그 자질을 꿰뚫어본 ‘배우’에게 납치당한 그 소년이 본 것은 고즈넉한 서코노스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번영한 대도시였다. 숲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도 없고 그나마 자라나는 초목들은 포장된 길 구석에서 애처롭게 자라고 있었고, 바닷물은 탁한 초록색으로 이상야릇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 도시 구석구석, 빽빽하게 들어찬 벽돌집들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얼굴이 누렇게 뜬 공장 노동자들이 몰려나오곤 했어. 너무나 낯선 풍경이었어. 분명 동경하던 도시였는데도, 그 시골뜨기 소년이 그 첫 만남에 느낀 것은 기대와 설렘이 아닌 위화감이었다. 지저분한 기술을 배우고 그것에 보람을 느끼면서도 이 위화감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지. 당연해. 소문 속 도시에 대한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었고, 또 그는 서코노스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태생적 한계도 갖고 있었거든. 서코노스에서는 마녀의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사회에서 격리된 그는, 이번에는 외국인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사회에서 유리되었던 거야. 어딜 가든 변함없다, 라는 것이 사춘기를 맞은 소년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날, 아마 겨울이었을 거야. 지금이라고 별로 달라진 것도 없지만, 그 때는 특히나 고래기름 정제를 하는 데에는 여러 독한 약물들이 사용되었지. 공장장들이야 안전한 지대에서 담배나 피우며 노동자들이 일하는 꼴을 구경만 하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의 일꾼들은 그 독한 기운을 가감없이 잔뜩 들이마셔야 했지. 가끔 운 나쁜 일꾼들은 그 독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곤 했고, 그러면 대개 그들은 약식으로 ‘해고’당했지. 이 바닥의 생리가 원래 그렇잖아? 그 남자가 공장 변두리에서 만났던 노인도 그 부류의 인간이었어. 딱히 감동적이거나 교훈을 주는 그런 만남은 아니었어. 노인은 물을 달라고 했고, 남자는 그를 무시하려고 하다가 죄책감에 못 이겨 맥주를 줬지. 노인은 그것을 들이킨 뒤, 숨을 거두었다. 딱 그 정도였어.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찬란한 제국의 수도조차도 서코노스와 생판 다른 것이 없음을 깨달았지. 그리고 그 때 이후로, 남자의 힘에 대한 갈망은 더더욱 강해졌던 거야.
이 갈망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정의감? 아냐. 내 생각에 정의감이란 건 좀 더 넓고 포용적인 데다가 모든 것을 보듬어 안는 따뜻한 무언가야. 그렇지만 그 남자의 갈망은 좀 더 난폭하고, 다가오는 모든 것에게 쉽게 이빨을 드러내는 종류에 가까웠어. 쓰레기장의 들개들이 다른 동료격 되는 개들이 죽는다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 봤나? 아니지. 오히려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해서 주변의 모든 것에게 으르렁대고 악으로 가득 찬 발악이나 해 대는데, 그 때 남자의 태도는 그거와 비슷했어. 자신도 언젠가 비슷한 꼴이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 같은 거죽을 뒤집어쓴 인간에 의해 쉽게 농락당하는 또 다른 인간에 대한 일말의 연민. 그 후 남자가 인간-특히 저 위의 높으신 양반들 말야-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품게 되고, 또 능멸을 좋아하는 인간들을 반대로 능멸할 힘, 초자연적인 마법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겠지. 단순히 칼을 잘 쓰거나, 활을 잘 쓰거나, 총으로 과녁을 잘 맞춘다거나 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던 거야. 남자의 어머니는 늘 말했지. ‘마녀를 건드리지 마라.’ 그렇다면 마녀들이 갖고 있는 힘, 즉 마법을 가져서 스스로를 압도적인 존재로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 생각에 기반해서 남자는 과학원에서 과학자 행세를 하면서 마법을 연구하고, 각지의 ‘성소’를 헤매며 마법을 손에 넣을 길을 찾아다녔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 지금 생각하면 감천은커녕 그냥 하늘이 날 놀려먹으려고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쨌든 별 짓을 다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내 귀에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지. 이 세상을 뒤바꿀 만한 힘을 원하는 거냐고, 그리고 이 힘으로 얼마나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기대해볼 수 있겠냐고.
너도 알겠지? 그래, 방관자였어.
그 속삭임 이후로 남자의 삶은……많이 달라졌어. 평범한 외국 출신 암살자에 불과했던 남자는 방관자의 낙인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던월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던월의 검’으로 불리게 되었지. 어떠한 보디가드도, 어떠한 보안장치도 ‘던월의 검’이 마음을 먹는 순간에는 그냥 종이갑옷에 불과했어. 수십, 아니 백 명도 훨씬 더 되는 사람들이 그 치명적인 칼끝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정도니, 평범한 사람들의 공포심이 어느 정도였을지 쉽게 상상이 가능해. 그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고, 의뢰인들 뿐 아니라 적들도 늘어나기 시작했지. 그렇지만 그와 정면으로 맞붙으려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지. 알다시피, 마법이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그 남자는 마법을 얻은 이후로 단독활동 대신 조직활동으로 전향하기에 이르렀어. ‘고래잡이’, 그래. 반응하는군.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남자의 칼에는 단순한 직업정신 외에도 사적인 감정도 담겨 있었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신부, 후계자가 되기에 지나치게 어린 아이들, 자신의 곁으로 다시 찾아와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정부들, 자식의 재정적 지원에만 의존하는 늙은 부모 등등……암살대상들의 가족 사항 따윈 알 게 아니었어. 상상해 봐라. 상식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면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관례지만, 알다시피 제국은 황제의 통제가 그렇게까지 강한 나라는 아니었으니까 나 같은 자들이 활개치고 다닐 수 있었지. 암살을 의뢰하는 이들은 대개 제정신이 아니거나, 제정신이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줄 모르는 이들 투성이였어. 혈육이나 우정 따위는 이미 옛저녁에 집어던진 지저분한 다툼. 치졸한 힘의 진자가 자기한테 조금이라도 기울어지게 기를 쓰는 진흙탕 싸움. 그런 싸움에 얽힌 이상 등에 칼이 꽂힐 각오는 해 뒀어야지. 그리고 그 남자는……의뢰를 받은 이상 충실하게 수행을 하긴 했지만, 의뢰인과 암살대상들의 관계에서 언제나 모멸과 경멸을 동시에 느끼곤 했지. 인정하긴 부끄럽지만, 그런 ‘더러운 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는 순간 종종 통쾌함마저 느끼곤 했지.
……너도 알겠지만,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그런 법이야. 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갈 것만 같고, 그렇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법이지. 게다가 사소한 것 하나라도 자신의 온전한 힘으로 성취되면 그 야욕은 끝간 데 없이 부풀어오르기만 한다니까. 꼭 풍선처럼 말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치기로 가득 찬 시절을 거치기 마련이야.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부끄러움과 겸손을 배우기 시작하는 거지. 가끔 예외는 있지만 말야. 너한테도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을 거야.
그래, 인정하자. 그 자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 있었어. 돈, 돈, 돈! 한 줌의 동전을 받으면서 그 남자는 상대방의 동맥을 검으로 긋고, 그들의 목에 독을 흘려 넣고, 그 눈알에는 화살을 박아 넣는 행동을 여러 해 동안 자행해 왔다. 자릿세를 물면서 과일 좌판을 뒤엎은 조무래기 갱? 동전 100닢! 상대편 갱들의 우두머리의 머리를 원한다고? 200닢은 가져와라! 저 상인의 유산을 가로채고 싶나? 아버지의 유산을 빨리 투기하고 싶다고? 400닢 이하로는 절대로 안 돼. 소아성애자 귀족들이라, 위험수당과 그들의 ‘가치’를 따지면 최소 500은 받아야겠군! 봐, 그의 모습을, 그가 해온 일들을. 동전 한 닢당 그 녀석들의 목숨 하나. 경전이나 동화에서는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고들 말해대지만, 천만의 말씀이야. 탐욕스럽고 음탕하기까지 한 그 자들의 목숨은 동전 100닢, 아니 한 닢조차도 무가치해. 그는 그렇게 생각했어! 황궁에서는 황제의 앞에서 아첨을 떨고, 귀족들 상대로 간드러지는 예의범절을 보여도, 자신의 저택 밀실에서는 노동자 한 달치 월급에 팔려온 소년과 소년을 성적으로 유린했고, 갓 시골에서 올라온 처녀들을 낮에는 하녀로, 밤에는 창녀로 써먹는 그 치들의 추태들을 보라고. 종종 도가 ‘지나쳐서’ 아이들이 숨을 거두면 돼지우리에 그 시체를 넣어두고, 하룻밤 방치해두면 아이들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소녀들이 성병에 걸리면 적당한 약물로 치료를 한 뒤에 골든캣으로 헐값에 팔아 넘기거나 거리의 매춘부로 전락시키지. 결국 남는 건? 자기 자식들을, 자기 형제자매를 팔아넘긴 가족의 회한과 그 동전들뿐이야. 그들은 가족을 판 돈으로 곰팡이 핀 빵을 사고, 상한 과일을 목구멍 너머로 채워 넣으며 눈물을 흘리겠지. 그렇지만 허기가 지는 순간 다시 그 자들은 또 다른 자식들을 팔 궁리에 빠지지. 왜냐고? 배가 고프니까! 어떤 이들은 죄책감이 공복을 압도할 때, 자신들이 다시 짐승이 되기 전에 자식들을 먼 곳에 버리고 온다. 버리지 말아달라고, 제발 같이 데려가 달라는 아이를 두고 인파 너머로 사라져. 그리고 그 아이에게 남은 길은 어설프게 소매치기를 하다가 맞아죽는 일, 주시자의 사냥개에게 물려죽는 일, 그리고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굶어죽는 일이지. 가끔, 아주 가끔 자식을 두고 자살한 부모들도 있지. 아이를 팔아 넘긴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우습지 않나? 이 찬란한 제도와 눈부신 공업 사회의 밑바닥에 이런 인간들이 깔려있다는 것이 말야. 인간적인 정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도와줄 총알받이가 필요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고아들 중 극히 일부만을 뽑아다가 내 부하들로 삼았지. 내 선택조차도 받지 못한 이들은 이미 던월의 그늘이 집어삼킨 지 오래야.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내 기억 속에서도 잊혀져서, 오직 저 빌어먹을 검은 눈만이 그들을 기억하겠지. 마치 네가 당할 뻔 했던 것처럼!
그래, 이제야 깨달았어. 나는 그들을 증오했기에 기꺼이 청부살인자로서의 18년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향에서 납치당한 경험도, 맑고 성실했던 젊은 정신이 던월에 오염된 것도, ‘던월의 검’이라는 공포의 호칭을 얻은 것도, 뒷골목 인간들의 증오의 대상이 된 것도, 부하의 배신을 당한 것도, 이 모든 것은 그 지저분한 자기만족과 복수의 순간만으로 충분히 해소될 수 있었어. 무소불위의 돈과 권력 위에서 뛰놀던 돼지들이 내 검이 목에 박히는 것을 느끼며 꽥꽥거릴 때, 내 손은 그 독에 절여져 죽어가던 노인의 손을 대신하고, 기아에 시달려 죽어가던 소년들의 손을 대신하며, 성병과 외상으로 산채로 죽어가던 아이들의 손을 대신한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들은 나일 수도 있었고, 나는 그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의 손을 대신해 나는 그들의 복수를 대행하고, 그들의 분노를 대행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해소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거지. 그렇지만 실상을 보면 어떤지? 내가 자의적으로 그들의 대행자가 되어 주었나? 아니야. 나는 내 지갑이 동전으로 두둑하게 채워지고 나서야 움직여서 대행자 행세를 했지. 결국 내 알량한 승리감 따위랑 상관없이, 나도 별수 없는 던월의 인간이었어. 밑바닥 인간의 생리를 충실하게 따르는 청부살인업자였던 거지. 나는 그들과 다른 게 전혀 없었어. 서코노스 출신? 흑마법을 사용하는 이단자? 차이라고는 고작 그거일 뿐이야. 다른 놈들은 그 정체성을 빌미삼아 나를 자신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로 어떻게든 치부하려 들었고, 나 역시도 언제나 자기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꼈지만, 우습게도 나야말로 던월스럽게 살아가고 있었어. 빌어먹을, 방관자 놈이 웃고 있을 것이 눈에 선하군.
그리고, 그리고……이번 의뢰도 평소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 평소처럼 무장을 하고, 룬의 가호를 받고, 마법을 사용하며, 근위병들의 눈을 피해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냥 지시 받은 대로 방어를 뚫고, 암살대상을 죽인 뒤에 그 자식을 납치하면 끝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 남자가 죽여온 무수한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녀의 죽음이 세상에 일으킬 파문도 기껏해야 종이배를 살짝 뒤흔들 줄 알았던 거지. 그녀 역시 다른 이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그런 부류의 인간일 줄 알았어. 정말로. 근데, 근데 아니었어. 그 여제의 장례식을 지켜봤어. 수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슬퍼하고, 그녀의 마지막 길에 색색의 꽃을 뿌리더군. 그저 평민들이 귀족들에게 으레 보이는 관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그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모든 게 어그러지기 시작했지. 후계자인 에밀리 칼드윈이 실종되니 하이람 버로우즈는 이제 거리낄게 없었지. 대섭정의 자리를 꿰차자마자 시민들이 사는 일반 지구와 고급 지구를 격리했고, ‘소독’이라는 명분으로 시민들을 학살해대며 문자 그대로 던월을 정화하려고 들었어. 우스운 놈이야. 결국 껍데기를 벗겨보면 다 똑 같은 내장과 뼈와 가죽으로 이루어진 법인데, 어째 그리도 귀족의 자존심을 고집했는지. 결국 귀족답지 않은 추태란 추태는 다 부리면서 죽은 모양이지만. 나중에 가니 식량배급은 절반으로 줄었고, 화약과 고래기름 생산량은 두 배로 늘렸다. 처음에 그나마 시체를 소각이라도 하는 척을 했지만, 다섯 개월쯤 지나니 금방 한계를 드러내서 시체를 아무데나 투기했지. 그리고 거기에서 흘러나온 물들은 하수구로 유입되어 역병을 더더욱 가속시켰고, 찬란한 제국의 수도는 이제 죽음의 수도가 되어버렸지. 그러고 나니 그 남자가 보고 싶지 않았던 그 광경들……자식을 찾는 부모, 죽은 자매의 시체를 부여잡고 우는 아이들,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의 산, 여름 내내 코에서 떠나지 않던 그 악취들을 보고 느낄 기회는 더더욱 늘어났지 뭐야. 아니, 그 악취와 시체, 인세에 구현된 지옥이야말로 바로 그의 손이 만들어낸 거지. 하, 이게 말이나 되나? 복수를 대행한다고, 교만한 귀족들에게 죽음의 겸손함을 가르쳐 준다고 의기양양해 했던 그 젊은이가 저지른 자만의 말로를 봐! 여제 또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 검을 내리꽂았는데, 그 한 번의 칼질이 사회의 기반, 제국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데에 결정적인 공로를 했어!
봐. 남자는 언젠가는 자신이 내리막길을 내려갈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 누구도 범접 못할 ‘던월의 검’이었지만, 그가 속한 세계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판디시아의 정글과도 같은 곳이지. 아무리 높은 산에 올라가 봐야 언젠가는 황혼이 찾아오는 법이지. 다른 갱들이나 그들이 고용한 암살자들, 심지어는 자신들이 키운 ‘고래잡이’의 검이 자기 등짝에 꽂힐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했고, 자기 최후가 백발이 되어 손주들에게 둘러싸여서 침대에서 맞는 평온한 것이 되지 못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어. 그렇지만……이런 형태로 최악의 자충수를 두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20년도 넘는 세월 동안 그가 지내온 던월의 땅, 서코노스보다 익숙해진 제2의 고향을 열심히 그 발로 짓밟은 셈인데, 정말 웃기지 않나?
언젠가 방관자는 남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은 그저 방관할 뿐이며, 그저 우리들의 선택과 그 앞길을 구경하며 즐길 뿐이라고 말이야. 그가 준 것은 마법뿐만이 아니야. 완전한 자유 역시 그의 선물 아닌 선물이지. 그 자유는 육체적 한계, 정신적 한계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더 나아가 도덕과 자제력의 빗장마저 푼 뒤 우리의 의지가 어디까지 날뛸지 시험한다. 방관자와의 접촉으로 인해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선택과 결과는 오로지 우리의 몫이 될 것이며, 그 책임 역시 우리가 져야겠지. 비록 한계는 있다지만, 세상의 법칙을 뒤틀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재단하는 초자연적인 힘을 얻은 자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가진 채로 세상을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야. 더군다나 방관자에게 ‘간택’ 받았다는 것만으로 이미 평범한 인간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니, 우리는 그야말로 마른 들의 불꽃마냥 한계도, 자제도, 금욕도, 그 어떠한 굴레도 없이 원하는 대로 뻗어나가게 되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주변에 남은 것은 새까만 잿더미뿐. 정작 지키려고 했던 가치 따윈 한 줌의 검댕이 되어버린 지 오래야. 방관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어……우리는 방관자가 아니고, 그와 달리 욕망을 갖고 있고, 미래를 볼 수 없으니까 이러한 짓을 거리낌없이 저지를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서 그 손이 저지른 결과에 망연자실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방관자는 공허에서 배를 잡고 웃겠지. 웃을 수 있는 지나 모르겠지만. 그래,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방관자거든. 빌어먹을 놈 같으니.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바라지 않던 그 순간이 왔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었지. 지금까지 '나름' 올곧았던 그의 신념은 여제의 죽음과 함께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회의는 마치 던월의 역병마냥 그의 온 정신에 뿌리를 내리고 결코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지. 의심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냐. 의심은 뒤를 돌아볼 기회를 주기도 하거든. 그런데 이 남자의 경우는 옆을 곁눈질하는 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게 문제였어. 한참을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지나온 길목마다 쌓여 있었던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과, 바로 그의 뒤에 서 있었던 여제의 원망하는 눈빛과 마주치고 말았어. 사람은 말야, 뒤를 돌아볼 수는 있지만 뒤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어. 기껏해야 과거를 바라보면서 앞길을 어떻게 더 올바르게 나갈지 생각을 하는 게 고작이야. 남자는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동전 몇 닢 그리고 알량한 복수심과 교환해온 생명들의 무게를, 비로소 동전의 무게가 아닌 실재하는 인간의 무게로써 느낄 수 있게 되었어. 그리고 그 순간 남자는 ‘후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웠지.
그리고……후회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지금까지 냉정하게 버려온 것들에 대해서 애착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어. 단지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주워서 사용했다고 생각한 고래잡이들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안 뒤로 그 감정들은 쪼그라들 줄 몰랐지. 아, 그 남자가 암살당할 것을 두려워한 것은 아냐. 오히려 그들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던 거지. 이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냉혹한 던월의 살인마가 아닌, 회한과 당혹으로 가득하고 자신의 가치관 하나하나를 의심하는 사내였지. 그런 자신을 고래잡이들이 여전히 신뢰하고, 여전히 예전의 모습일 거라고 믿고 있다는 것에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던월은 물론이고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더러운 직업을 하는 이가, 언제든 자기 등 뒤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제자’들에게 애착을 느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오히려 그는 자신들의 부하들이 지금의 자기에게 어리둥절해하고, 그 허약해진 두목을 향해 배반의 칼날을 갈 것이라고 기대했지. 그들에게 가르친 대로 말야. 어쨌든 그 남자는 이제 예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그렇지만 여전히 그가 원하는 대로 달리고 또 달렸어. 단 하나의 단서만을 손에 쥐고 도살장을, 그 거리를, 저택을, 수해지구를, 갱단의 아지트와 항구를, 그리고 브리그모어의 장원을. 근위병들과 도살자들을 손봐주면서, 주시자들의 습격에 맞서고, 갱단 간의 타협을 주선하고, 마녀들의 음모를 저지시켰지. 딜라일라, 딜라일라 코퍼스푼……어차피 100년도 못 가 스러지는 것이 우리의 숙명인데, 그 여자는 뭐가 그다지도 불만스러웠던 건지. 뭐가 그다지도 부족했던 거였지. 우리와 비슷한 존재였지만 결국 우리는 각자 다른 운명을 타고났기에, 서로를 영원히 이해 못할 운명인 거야. 그래서 그 마녀는 에밀리 칼드윈의 몸을 빌어 제국 위에 군림하기를 바랐고, 그는 에밀리 칼드윈을 그녀로부터 구해냈지. 처음 알았나? 하긴 그럴 만도 해. 그렇지만 이미 예전에 끝난 데다가 지금 너와도 추호의 관계도 없는 이야기야.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어. 신기하단 말야……젊은 시절에는 이렇게까지 말이 많지 않았거든. 그 남자의……아니다, 이제 와서 남 행세를 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그래, 그 남자는 나였어. 내가 내 생각을 전하려면 그저 ‘던월의 검’ 특유의 신속한 기술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했지.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행동은 둔해지는데, 점점 생각은 많아지더군.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저질러온 모든 것들이, 내 반생을 차지해온 암살이니, 살인이니, 현상금이니 하는 것들이 전부 흔들리고 있어. 난 도대체 왜 이렇게 달려온 거지? 제대로 달려오긴 한 걸까? 아니라면, 도대체 원래 목표에서 얼마나 멀리 온 걸까? 되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 갓 던월에 도착했던 패기와 야망, 그리고 순수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그 소년은 이제 완전히 죽어버린 것인가? 부끄럽게도 제법 오래 살아왔고, 나름 경험도 풍부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는데도 이 질문들에는 대답조차 할 수 없어. 우스워. 주변 상황에는 그토록 민감하고 날카로운 식견을 갖고 있는 주제에,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치졸한 자기합리화로 내 유일한 세상을 신나게 무너뜨렸잖아? 당연히 나를 열심히 따르는 고래잡이들을 볼 때마다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지. '이런 놈을 믿고 따라도 되는 거냐', 라고 되내면서 말야.
재스민 칼드윈, 도대체 그 여자는 어떤 존재였길래 그렇게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일까? 난 사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몰라. 그녀는 내가 속한 세상의 대척점에서 살아가는 고고한 황제님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녀가 처해 있었을 상황은 쉽게 상상이 가는군. 그곳의 생리는 이곳의 생리와 꽤 비슷할 거야. 그 화려하고 우아한 궁전과 귀족들의 저택은 겉껍데기에 불과하지. 오히려 그곳은 황실과 귀족들이 이런저런 것을 두고 다투는 정쟁의 정글과도 같아. 황제한테는 안된 일이지만, 귀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의회와 ‘공정한 법의 집행’을 위해 황권의 통제에서 느슨하게 벗어나 있는 사법부, 그리고 비밀유지와 국가의 안녕을 명분 삼아 껍데기 속을 보이려 하지 않았던 일부 기관들은 황권에 비해 너무 강했어. 너도 잘 알 하이람 버로우즈 같은 독사녀석만 보더라도 황제가 얼마나 휘둘렸을 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선대 황제……그 여제는 통솔력이 자기 아비보다 못했지. 훨씬 자비롭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동화책과 달리 이 세상은 자비와 관용만으로 돌아가지 못하거든. 좋은 여자긴 했지만 황제감은 아니었어. 그저 태평시대에 귀족의 딸로 태어나 남편을 두고, 여러 자식을 두고 편하게 살다가 편하게 가는 것이 그녀에게는 훨씬 더 편한 인생이었겠지. 진정해,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나? 여제를 제 손으로 죽인 주제에 걱정하는 말을 한다는 게 가증스럽나? 마음껏 원망해라. 넌 그럴 자격이 있고, 난 비난 받아 마땅하니까.
사과는 하지 않겠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기에는 너나 나나 너무 먼 곳으로 와 버렸어. 사과를 진정으로 하고 싶다면, 나는 20여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 눈을 빛내며 암살을 배우던 그 어린 소년을 죽였어야 했겠지.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어. 너도 알겠지? 아무리 목숨이 덧없고 허약한 것이라고는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 무게가 감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백 명도 훨씬 넘는 생명을 앗아온 내가, 도대체 무슨 염치로 가증스럽게 사과를 한단 말이지? 죽은 자에게 도대체 무슨 수로 머리를 조아리겠나? 그들의 가족은 무슨 수로 찾아야 하나?
방관자여! 보고 있나? 나는 이제서야 후회하고 있어! 내 미숙한 자만심과, 막연한 증오가 초래한 내 미래가 이다지도 엄청난 결과로 돌아오게 했다는 게 너무나 후회스러워. 지금 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그저 평범한 시골뜨기로 살다 죽었어야 했다고 탄식하고 있지! 너는 분명 공허에서 이 상황을 비웃고 있겠지? 증오했던 자와 증오하는 자가 한 데에 만나, 마침내 이 지저분한 피날레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야! 이것이야말로 몇 십 년에 한번 올까말까 하는 너의 소망, 네 지루함을 달래줄 찰나의 소극이지!! 웃어라! 마음껏 웃어! 그렇지만 이건 알아둬라. 네놈이 초월자인 것은 상관없어. 한때 내 자랑이었던 내 마법조차도 너의 힘을 빌린 모조품이라는 것도 상관없어! 지금까지의 나의 선택은 너의 것이 아닌, 엄연한 나에 의한 것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이 한 인간의 비루한 영광과 비참한 최후도 온전히 내 선택이고, 난 지금부터 어떠한 기만도 없이 나 자신을 드러낼 테고, 어떠한 최후가 다가오든 간에 마땅히 받아들일 거다! 이제 충분한가?
……그래, 이것으로 내 이야기는 끝이다. 자, 받아둬라. 전부 너의 것이니 너한테 돌려줘야지. 원래는 폐공장 구석에 던져놓을까 했지만, 생각을 바꿨어. 어제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다시 네가 나한테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 그 때에는 그 고래잡이의 검보다는 네 손에 가장 익었을 네 검이 더 쓸모 있지 않겠나? 썩 훌륭한 무기더군. 내 부하들도 네 무기를 제법 눈독 들였을 정도니까. 검을 뽑아. 당장이라도 쏠 수 있게, 총도 장전해 놔. 이제는 너와 나만의 시간, 방관자에게 선택 받은 비틀린 인간들만의 시간이야. 다른 녀석들은 방해할 수 없을 테고, 내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토마스는 놔 줘라. 네 증오가 향할 곳은 나 뿐이니까.
네가 바라던 대로 해 봐라. 날 죽여봐. 곱게 죽어주지는 않을 거야. 아니,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서 널 다시 방관자 곁으로 돌려보내주지. 네 원한대로 움직여주기에는 나도 너만큼이나 미련이 꽤 많은 인간이라서 말이야. 던월의 검이 이길지, 아니면 전직 호국경이 이길 지는 방관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겠지. 결과가 어떻게 되든 뭐 어떻겠나. 중요한 건 바로 이 순간이 나와 너한테 찾아왔다는 거지. 복수와 설욕의 순간, 자기기만과 배신이 부재한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네가 바라던 최고의 복수가 아니었나?
좋아……그럼 덤벼라, 코르보 아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