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스아너드

까마귀 이야기 - 7화

오덕하라 2014. 7. 22. 00:54

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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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이 머리에 들이부어지고, 남자는 난폭한 손아귀에 이끌려 눈을 떴다. 불처럼 뜨거운 머리에 들이부어진 그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뇌수 속까지 징징 울리는 것만 같았다. 퉁퉁 부은 눈을 힘겹게 뜨기가 무섭게 무언가 딱딱한 것이 얼굴을 후려친다. 남자는 거의 신음조차도 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무언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난폭하게 흔들었다. 이제 막 눈을 뜬 남자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누군가가 그에게 무어라고 거친 말을 몇 마디 퍼부었지만, 남자는 이제 그것조차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그저 자신의 머리칼이 나부끼는 것을 보면서, 아주 많이 길어졌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낮과 밤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게 된지 오래 되었다. 남자의 일상 속에서 시간은 거의 의미가 없었고, 그저 세 공간이 끝없이 반복될 뿐이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방과 기나긴 복도, 축축한 심문실. 감방, 복도, 심문실. 감방, 복도, 심문실. 세 장소 사이를 챗바퀴 돌리듯 빙글빙글 돈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 탓에 최근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래봐야, 대부분은 이 장소들에서 벌어지는 일들 투성이였다. 어떤 때에는 차가운 감방 구석에 미동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워있기도 했고, 침대 위에서 담요를 둘둘 말고 고열에 시달리며 환각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심문실에서의 기억은 유독 선명하고 다양했다. 질식하기 직전까지 물 속에 얼굴을 처박힌다거나, 새빨간 인두로 지져진다거나, 채찍으로 얻어맞는다거나, 옹골찬 주먹으로 얻어맞는다거나, 손톱을 뽑힌다거나, 몇 시간 동안 잠을 못 자게 한다거나, 말을 할 때까지 구타당한다거나 등등. 이상하게도 복도를 지나가는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요 며칠 사이 심문실에서 정신을 완전히 잃는 빈도가 늘어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저, 그가 절망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세 장소가 영원히 반복되고, 선명한 태양빛을 꿈꾸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못하는 절망. 남자는 바닷속에 가라앉는 것이 그런 느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해 바닥에 누워서 수면을 바라보면 어떤 느낌일까. 물 밖에서는 그렇게 찬란한 햇빛은 물 속에서는 천천히 그 위세를 잃고, 마침내 심해 바닥쯤 되면 가장 약한 등불만도 못한 수준이 된다. 그래도 그 꺼져 버릴 것만 같은 빛은 바다 밑 시체에게, 언젠가 햇빛을 쬘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약 없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없느니만도 못한 희망이다. 그리고 남자는 종종 꿈 속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를 듣곤 했다. 어떤 때에는 감미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이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저주와 원망에 가득 찬 목소리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서서히 구덩이 속에서 썩어가는 남자에게 있어 그 여자의 목소리는 심해 속 가냘픈 빛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는 병들어가는 몸을 채찍질해가며 억지로 잠에서 깨어났고, 가슴을 가르는 듯한 고통에 밤새 몸부림치곤 했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빛이 없는 세상 속, 육체뿐 아니라 정신마저 서서히 부패해가는 지옥.

“또 정신 잃은 거야? 엉? 제대로 대답하시지?”

거친 손이 다시 뺨을 후려갈긴다. 이제 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남자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병사와 고문관을 본다. 벙어리 고문관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찍찍대는 소리를 보니 아무래도 쥐 같았다. 병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씩씩대고 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얻어터지면서도 굳게 닫혀 있었던 남자의 입에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여자의 목소리를 또다시 떠올린 남자는 성가시다는 듯이 병사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덮을 정도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 사이로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눈이 보였다. 병사는 그 표정에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 듯 했고, 증오를 가득 담아 남자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피 섞인 위액을 토해낸 남자는 조용히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병사를 쳐다보았다. 이제 지겨웠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병사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고, 남자는 병사의 목을 잡은 뒤 손에 힘을 주었다. 병사는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손톱을 세웠지만, 그저 남자의 검은 옷 위만 긁는 데에 그쳤다. 남자는 그걸 좀 더 지켜보다가 한 손으로 병사의 머리를 잡고, 옆으로 꺾었다.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병사는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남자는 한 뼘 정도 되는 금속봉을 꺼내고, 허공에 던졌다. 찰칵 하는 맑은 금속음과 함께, 그 금속봉 안에 접혀 있었던 칼날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렁이는 화로 불을 반사하는 칼날은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회전하는 빛은 이중날을 펼치면서 그의 손 안에 들어왔고, 본래의 모습인 긴 검으로 돌아왔다. 그 칼에 반사되는 주황색 빛을 잠시 감상하던 남자는 마침 자신을 돌아본 고문관을 발견했다. 고문관은 인두를 들고 덤벼든다. 인두를 피하고 그 빨간 궤적을 구경하면서, 남자는 그대로 고문관의 배에 칼을 꽂았다. 워낙 단단한 몸인지라 생각만큼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약간 비틀면서 힘을 주자 그대로 칼날의 접힘선 부분까지 넣을 수 있었다. 벙어리의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남자는 그대로 검을 옆으로 그으면서 뽑아냈고, 고문관의 찢어진 복막 틈으로 내용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대로 발로 고문관의 무릎을 걷어차 꺾고, 그가 바닥에 넘어지기도 전에 검으로 그 머리를 내리치고, 내리치고, 또 내려쳤다. 더 이상 내려칠 것이 없어지자 이번에는 어깨 아래를 내려치기를 반복했다.
그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정말로 내려칠 것이 없어졌다. 남자는 렌즈에 튄 피를 닦은 뒤 바닥에 남은 잔해를 확대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검은 옷은 붉은 피로 뜨겁게 물들어 있었고, 이유 없는 허탈감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강렬한 무언가가 그를 온몸을, 온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검을 떨어트리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렇게 더운데, 저렇게 뜨거운 화로가 바로 옆에 있는데, 이 오한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는 별 이유 없이 고문관의 잔해 속을 허겁지겁 헤치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 안에 누워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빨간 머리띠 끝에 달려있는 리본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남자는 그것이 본래 흰 색의 천이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것이 불러일으킨 이상한 감정에 이끌려 남자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은 그립고 쓸쓸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 근원을 분간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한 기이하기 그지없는 감정이었다. 남자는 그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큰 손으로 렌즈를 가렸다. 그러자 앞이 새카매졌고, 빨갛고 하얀 리본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잠시 그는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만 같았다.

***

“코르보, 또 잠에 든 건가?”

어느 새 꿈 속을 헤매고 있었던 남자는 청년의 부름에 비로소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여전히 공허 속에 있었다. 지난 악몽 속에서 간신히 헤어난 푸른 눈은 공허 속을 불안하게 여기저기 헤엄친다. 청년은 여전히 그의 건너편에 앉아 있었고, 그의 한 손 역시 찻잔을 쥐고 있었다. 저린 듯한 두통과 규칙적인 물소리도 여전했다. 손에 닿을 듯 가깝던 고래는 이제 저만치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심장은 그의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꿈이었다.
아니, 꿈이라고? 그렇다면 여기는 현실인가? 밑도 끝도 없고 눈부신 태양과 은은한 달, 희미한 별조차 없는 이 세상,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고, 천장이 바닥이며 땅이 바다인 이 세상이 현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눈부신 파란 하늘은, 새하얀 모래사장은, 회색 건물이 늘어선 대도시는, 새하얀 궁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전부 현실이지.”

검은 눈으로 남자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대답한다. 남자는 그 시커먼 눈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마주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당황한 모습은 저도 처음 봐요.”

이번에는 심장의 차례였다.

“늘 침착했던 당신.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어요.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땅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흘러 들어온 그 소년에게 발붙일 곳을 내어준 이는 없었죠. 당신은 그 발판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벽 또한 만들었죠. 어느 누구도 당신의 안으로 침범해서, 그 안을 보지 못하도록 할 그런 벽을 말이에요. 당신은 성공했죠. 그런데……그건 너무 성공적이어서 탈이었답니다. 결국에는 당신조차도 그 벽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인간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벽이지. 인간은 보물을 지키기 위해 벽을 쌓는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은 추악한 것 역시 벽 속에 밀어 넣고 봉해버리지.”
“저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그 불안함을 떨쳐버린 것처럼 보였어요. 그 굳건한 벽조차도 저와의 만남으로 허물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이제 서로를 차차 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뭐에요. 당신은 행복해 보였고, 저 역시 행복했으니 그저 위정자로서, 황제로서의 처신만 한다면 만사가 전부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의미한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았군요.”

남자는 심장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심장의 말에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가슴이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잘 기억나지 않나 보군. 떠올리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웠나? 서두를 건 없어. 1초든 100년이든, 공허에서 시간의 길이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그러니까 천천히, 느긋하게 떠올려 보도록 해라. 시간은 아주 충분하고 나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으니.”

몸이 여전히 무거웠다. 물 먹은 솜처럼 의자 속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는데, 이 기묘한 두 존재들은 자신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종용한다. 중요한 것을 다시 기억해 내라고, 중요한 것을 선택하라고 계속해서 강요한다. 지겨웠다. 그만 좀 놔줘, 라고 남자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다시 불편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 걸까? 분명 예전에는, 정확히 얼마 전인지는 기억은 안 났지만, 하여간 이전에 그의 몸은 이렇지 않았다. 예전에는 좀 더 가벼웠고 민첩했으며, 거의 모든 행동을 그 자신의 생각대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지겹고 피곤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에밀리……그 아이는 6개월 동안 어떻게 자랐을까요? 이제 편식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요? 필슨 부인이 없어도 잠을 잘 자게 되었을까요?”

어쩌다가 필슨 부인이 높은 선반 위에 올라가 있을 때가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작고 어렸던 소녀는 필슨 부인을 선반에서 꺼내기 위해 까치발을 세우고 발을 동동 굴렀고, 종국에는 신경질을 내며 종주먹질을 했다. 그리고 소녀의 짜증이 최고조가 될 즈음, 어디선가 소녀의 기사님이 나타나서 해결사 역을 자처했다. 기사님은 소녀보다 키가 컸기에 그저 손을 내미는 것 만으로도 필슨 부인을 선반에서 꺼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기사님이 소녀에게 인형을 안겨주면 그제서야 소녀의 뾰로통한 표정은 밝은 미소로 변했다. 아직 기사님의 허리께에도 닿지 못할 정도의 소녀는 기사님에게 손을 벌렸고, 기사님은 그 소녀를 폭 끌어안아 토닥여 주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 수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나의 권능을 부여 받기를 원했고, 그것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과감하게 감행했을 정도니. 그렇지만 그들의 삶이란 하나같이 어디선가 본 이야기들 투성이였다. 내 지루함을 잠시나마 달랠 상대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지. 다행히도 너의 시대에서는 여러 명의 인간들이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너 역시 그 중 하나였지만, 다른 이들 중에서도 특히나 재미있었어. 너에게 반역자라는 오명을 씌운 캠벨을 기억하나? 너는 그 모순된 종교관의 팔을 검으로 절단하고, 참수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자는 자신이 온갖 쾌락과 향락을 누렸던 그 방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겠지. 자신의 권력과 비밀을 위해 저질러온 수많은 죄들을 그 피로 참회하면서. 그렇지만 너는 그 자에게 피의 복수를 행하는 대신 불의 복수를 행했다. 이제 그 자는 얼굴 깊숙이 파고든 낙인을 긁어내려는 헛짓을 하면서, 가면 쓴 암살자를 영원히 저주하겠지. 그 자가 행해온 악행은 이제 세 곱절로 그에게 되돌아와 목숨이 다 하는 순간까지 그를 괴롭힐 것이다.”

“언젠가 그 아이도 어른이 되겠죠. 몸도 마음도 성숙해지고, 황제로서 제국을 책임진다는 막중한 의무를 깨닫게 될 날이 올 거에요.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정교사들과 보낸 지루한 공부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겠죠. 그렇지만 아직 그 아이는 너무 어려요. 그 동안 우리 사이에서 벌어졌던 많은 일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연약하고 섬세한 아이일 뿐이죠.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한들, 내 죽음을 이해했다고 큰소리 쳤든 결국 딱딱한 역사 공부보다 필슨 부인과의 소꿉장난을, 다과회를, 당신과의 칼싸움과 잡담을 사랑하던 아이에 불과했던 거에요. 적어도 그 아이가 옥좌에 몸을 의탁하고, 머리에 관을 쓰게 될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충분히 사랑하고 보듬어줘야 했을 텐데. 나는 왜 이제야 그걸 깨달은 것일까요?”

주변 사람들은 호국경이 소녀를 무등을 태워줄 때마다 놀라워하곤 했다. 호국경은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아주 강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범접할 수 없는 기암과도 같은 남자였다. 그렇지만 소녀는 그런 호국경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가곤 했다. 그리고 비록 자주는 아니었지만, 호국경 역시 시간이 나는 대로 에밀리를 안아 무등을 태웠다. 아직 키도 작고 가벼웠던 시절의 에밀리는 그의 어깨 위에 앉을 때마다 너무 높다면서 까르르 웃곤 했다. 그 아이가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헝클어뜨리든 말든, 호국경은 행여 아이가 굴러 떨어질 까봐 아이의 가느다란 양 다리를 굵직한 손으로 꼭 붙잡았다.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지금이라도 그 손아귀 안에 가느다란 다리가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익숙한 낯선 두통을 동반한 공허뿐이었다.

“저는 예정보다 일찍 돌아와서 정말 기뻤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올 수 있었나요? 게으른 외교관들과 돈 밝히는 관리들에 역병까지, 그 방해물들을 도대체 어떻게 뚫고 올 수 있었나요? 너무 무리하지 않았나요? 힘들지 않았나요?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나요?”

아니었다. 힘들지 않았다. 그의 귀로를 막는 외교관과 관리, 역병 그 어느 것도 그의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하얀 탑 안에서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두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대가도 치를 수 있었다. 이제 항구에 도착한 남자는 익숙한 풍경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흰 옷을 입은 소녀는 그를 발견하고 달음박질친다. 소녀의 입은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환희에 가득 찬 그 얼굴을 향해 그는 손을 벌렸다. 그의 품 속으로 뛰어든 소녀의 따뜻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의 품 안에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 세계 그 자체가 있었다.

“펜들턴 형제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아직도 여자의 몸을 탐닉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자신들이 겪을 비참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리둥절한 채로 갱들의 손에 잡혀 그 머리를 밀리고 혀를 뽑힌 다음, 원래의 향락의 세계에서 추방되어 고통과 인내의 세계로 끌려가고 있는 것일지도. 어찌되었던 간에 그들의 말로는 그들의 태생과 성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런 종류가 될 것이다. 이 또한 너의 업적이다.”

느닷없이 열린 문 너머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던 소녀는 뒤집힌 매트리스 뒤로 숨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검은 옷과, 그 얼굴을 가리는 무시무시한 해골 가면. 소녀는 누구세요, 라고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에 남자는 해골가면을 벗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렇지만 가면이 얼굴에서 벗겨지는 그 순간, 남자는 소녀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 몹시도 두려웠다. 그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그 아이를 만났을 때에 비교해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렇지만 불안으로 가득 차 있던 소녀의 얼굴은 남자의 얼굴을 곧바로 알아보면서 환하게 변했다. 소녀는 그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6개월 전 그 순간처럼 아이를 끌어안은 뒤 한 바퀴 비행기를 태워주었다. 소녀는 웃었고, 그는 아직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이제 이 아이와 그는 도망을 칠 것이다. 더러운 매춘굴도, 음탕한 귀족들도, 잔혹한 군인들도 손을 대지 못할 안전한 장소로. 아이를 내려놓고 머리를 쓰다듬던 남자는, 문득 아이가 이전보다 키도 컸고 몸무게도 약간 더 무거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와 그녀가 없었던 그 동안에도 아이는 꿋꿋하게 자라고 있었다.

“나는 대섭정에게 속았어요. 그 자의 간계에 놀아난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리는군요. 그의 농간으로 제국의 아름다운 풍경과 내가 사랑했던 백성들은 모두 비참한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요. 가장이던 남자들은 하수구 속에서 쥐들의 식사거리가 되어있고, 신선한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여인들은 쓰레기 속에서 오물을 건져먹고 있죠.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할 부모형제를 찾으며 죽을 때까지 울부짖을 거랍니다. 그 자는 그 비통한 신음소리를 들을 줄 몰랐던 걸까요? 아니면 자신의 오래되고 얄팍하기 그지없는 욕망을 충족하는 데에 골몰해서 그 소리를 무시했던 걸까요? 나도, 당신도, 에밀리도, 귀족도, 그 모든 이들이 그 자의 권력놀음 속에서 놀아났다니. 난 그를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를 믿어서는 안되었어. 그렇지만 대섭정의 첩, 에스마 보일에게는 여전히 동정심이 느껴지네요. 이상해요. 내 몸은 이미 한 줌의 흙과 먼지가 된 지 오래인데, 그 값비쌌던 옷과 장신구도 구더기들의 먹이가 된지 오래일 텐데, 어째서 이 감정만은 여전히 생생한 거죠? 내 이 심장이 온기를 간직하고 있기라도 한 걸까요?”

보일 가의 몰락은 그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축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보석과 장신구로 치장한 값비싼 가면들은 끊임없이 경멸과 비방을 일삼는다. 평민, 외국인, 역병, 친구, 가족, 재물, 외교, 여제의 죽음, 불명예한 호국경. 제국을 뒤흔드는 모든 주제들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한 줄의 가십거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의 틈으로, 허름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죽음의 가면 하나가 숨어들었다. 비일상을 가장한 무도회였기에 그 지나치게 이질적인 존재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회장 안으로 녹아들어갔다.

붉은 가면을 쓴 여인은 두려움에 손을 들어올려, 하지 않느니만도 못한 미약한 저항을 했다. 남자의 거친 손아귀에 잡힌 목은 마지막 단말마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남자는 접힌 검을 꺼냈지만, 그것을 펴지는 않았다. 남자의 머리 속에는 여인의 일기의 내용이 떠올랐다. 문란하기로 이름나 있었던 에스마 보일의 몸 안에는 이제 기능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진 자궁이 들어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도 있는 자궁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생명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반반씩 닮은 얼굴을 하고 태어났을 것이다. 남자는 잠시 주저한 끝에 보일 여사의 목을 졸랐다. 손아귀 안에 들어온 목은 가늘고 부드러웠다. 그 감촉에 남자는 어떤 여자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고, 자기 자신을 역겹게 여겼다. 그리고 기절한 보일 여사를 어깨에 메고, 지하실 깊은 곳으로 향했다.

“차마 여자를 해할 수 없다는 기사도 정신 때문이었나? 아니면 자신을 그 암살자들에 겹쳐 보고, 그들과 비슷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심정이기라도 했나? 뭐, 둘 중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둘 다 일수도 있지. 결국 에스마 보일은 너의 자비 덕분에, 아무도 모르는 어두운 지하실에서 썩어가는 결말을 모면할 수 있었다. 물론 이전처럼 사치란 사치는 모조리 누리며 살아갈 일은 두 번 다시 없겠지만 말야.”

침대 위에서 잠든 아이는 신음하고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나 봐요.”

젊은 가정교사는 걱정스럽게 아이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떼어내 준다.

“가엾어라…아직도 여제님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인 것 같네요.”

소녀의 입에서는 몇 마디 잠꼬대가 흘러나온다.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지만, 몇 마디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저리 가……기분 나쁜 눈……엄마……지만……코르보, 코르보……저리 가…….”

소녀는 심하게 뒤척였지만 여전히 잠에서 깨지는 못한다. 악몽 속 무언가에게 쫓기는 소녀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부모를 찾으면서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남자는 여자아이 옆에 앉았다. 낡은 침대는 남자와 그의 몸에 주렁주렁 달린 장비들의 체중으로 한쪽으로 꺼졌다. 무어라 나무라려는 가정교사를 조용히 제지하면서, 남자는 소녀의 머리를 큰 손으로 쓰다듬었다. 다른 손으로는 버둥거리는 소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피곤에 지친 몸을 소녀 쪽으로 기울이고, 귓가에 대고 무어라고 속삭인다. 미궁 속을 헤매는 공주님에게 자신이 여기 있다고 알리는 동화 속 기사처럼,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속삭인다. 아이는 약간 조용해졌다. 허공을 헤엄치는 손은 얌전히 기사님의 손을 잡고 잠이 들었다. 가정교사는 의외의 결과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남자에게 보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나를 유난히 기분 나빠했지. 그렇지만 내 말 덕분에 네가 자신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고생하는 것을 알았을 거야. 아직 제멋대로이고 치기 어린 나이이지만 생각보다 성숙하고 흥미로운 소녀였지.”

약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몹시 쓰라렸다. 그렇지만 그 때마다 소녀의 손이 멈칫했기에, 남자는 얼굴을 최대한 덜 찡그리고 움찔거리지도 않으려고 노력했다. 집요하고 악의를 가득 담아 새겨진 상처들이니, 다 치료되더라도 보기 흉한 흉터를 남길 것이 눈에 선했다. 이제 그는 옷을 벗을 때마다 자신이 당해왔던 일을 끝없이 확인할 것이었고, 그 순간들이 기억에 사라질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기억을 지울 수 없더라도 보지 않을 수는 있었다. 조금만 그 기억에서 눈을 돌리면, 그 앞에는 조막만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 상처를 메우기 위해 열심히 애를 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추한 다락방이었지만, 그는 그 작은 방 안에서 잠시나마 평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너무나 따뜻해서 살벌하고 긴장과 초조함이 가득한 그간의 기억조차도 그 온기 덕분에 잠시나마 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먼 훗날에는, 이 상처들도 켜켜이 쌓인 좋은 추억 아래에 묻혀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 너는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렇지만 그것은 미래의 일, 그것도 너의 마지막 복수가 성취될 때에나 실현될 그런 미래의 일이라는 걸 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거야. 마지막 복수를 넌 손쉽게 끝내지 않았지. 피로 물든 정자. 불과 고통으로 가득하던 고문실. 창부들의 눈물과 남자들의 욕망으로 넘실대던 골든캣의 소녀. 네 앞길과 그 발자국마다 남아 있었던 짙은 어둠은 다락방의 추억만으로 잊혀질 만한 것이 아니지. 그래, 첩보대장이자 대섭정, 하이람 버로우즈. 엘리트주의자이자 이 시대의 ‘혁신적’인 차별가. 그는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본격적인 메인 요리와도 같은 존재야. 버로우즈는 편집적인 망상에 휩싸여 던월 탑을 개축하고 등대를 건설하느라 부하들을 끊임없이 괴롭혔지. 또 군인들은 그런 그를 정신나간 망상가라고 경멸했다. 그렇지만 너의 귀환으로 그의 망상은 현실이 되고 말았고 버로우즈는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맛봐야 했지. 잘 생각해 보아라. 이제 생각날 거다. 너는 방해꾼들을 무력화시킨 후에도 버로우즈에게 곧장 가지 않았다. 버로우즈는 삼엄한 경비 한가운데에서 코르보 아타노가 자신의 목숨을 해칠 것이라는 망상을 반복했지만, 그의 진정한 적이 방송탑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지. 네가 그의 눈앞에 나타난 그 순간, 그를 칭송하는 프로파간다를 연일 내보냈던 방송탑은 평소와는 다른 내용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뭐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의 더러운 고백록이 던월탑에 공개되는 것을 들은 버로우즈의 첫마디였죠. 그는 타인을 헐뜯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명예에 결벽적으로 신경 쓰던 사내였답니다. 그렇지만 교활했던 그답지 못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우 또한 범하고 말았어요. 언젠가 자신의 신념이 기억에 묻혀 흐려질 것을 막기 위한 편집증의 말로였던 걸까요. 어쨌든 당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어요. 자신을 시궁창으로 몰아넣은 남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죠. 그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형벌이란 칼로 심장을 찌르거나 총으로 머리를 쏘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자신이 써왔던 가식의 가면이 무너져 그에게 충성하던 이들이 그를 적대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죽음이란 바로 정신의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었죠.”

그래. 그 순간 남자는 무언가를 기억해냈다. 어둑어둑한 안개 속에서 비추어지는 빛처럼 선명하고 강렬한 것이 그의 망각 일부를 깨부순다. 그 깨어진 틈새 사이로, 남자는 손을 집어넣고 기억의 파편을 꺼내어 들여다본다. 남자는 두 손으로 가면을 잡고 아주 천천히 벗는다. 길고 누추한 머리카락이 후드 틈새로 흘러내린다. 오랜 감금과 고문으로 약간 거무스름했던 얼굴은 창백하고 초췌하게 말라 있었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남자의 푸른 눈은 형형하게 빛났고, 눈 앞의 초로의 남자를, 자신의 검이 향할 대상을, 증오와 환희의 원천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섭정의 눈은 뼈대가 도드라진 왼손의 낙인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는 상복처럼 검은 옷을 쳐다본다. 자신의 운명을 예정 지을 터인 검을 바라본 뒤에야, 비로소 그 늙은이는 암살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은 일그러지다 못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저 자의 얼굴에 가득한 공포, 혼란, 경악. 해골가면 밑에 있었던 것은 과묵하고 무뚝뚝하지만 종순한 호국경이 아닌, 종잡을 수 없는 변칙성과 선과 악이 뒤섞인,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지 오래된 실어 상태의 암살자였다. 실로 달콤한 몰락이 아닐 수 없었다.
남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벌리고 그 때 자신의 입에서 나왔던 말을 되풀이했다.

“하이람……나를……기억하고 있소?”

산 자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탁한 목소리. 밟히고 짓이겨져, 진흙투성이가 된 목소리. 경멸과 쾌재가 뒤섞인 목소리. 대섭정은 지난 6개월 동안 품어왔던 자신의 공포와, 상대방이 쌓아온 분노를 그 한 마디만으로 넘치도록 충분하게 재확인할 수 있었다.

“너의 복수는 아주 신속했다. 대섭정은 자신을 따를 이가 곁에 없다는 것과, 자신이 두려워하던 이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광기 속으로 치닫고 있었지. 검을 뽑아 들고 중언부언 하는 그에게 너는 더 이상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그 자의 어깨에 칼을 꽂았을 때 만족스러웠나? 그의 목뼈를 손으로 부러뜨린 순간 느껴진 감촉에 지난 세월이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나? 우습게도 마지막 순간 그 남자는 후회했다. 자신의 계략이 설마 자신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야. 그렇지만 그 자비를 바라던 눈, 뉘우치던 그 눈에도 너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지. 그 후회는 자신의 악행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에 대한 후회였으니까. 요절한 여제와 매춘굴로 끌려가 어린 나이에 알맞지 않은 광경을 목격했던 소녀, 그리고 삶의 나락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호국경에 대한 사과는 결코 없었어. 그걸 알기에 너는 자신의 ‘사적인’ 복수를 행할 용기가 생겼던 거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하이람 버로우즈에 의해 명예를 실추당하고, 손에 쥔 것들을 강제로 빼앗겼던 냉혹한 복수자 코르보 아타노였다. 그 순간 너는 호국경이 아닌 암살자로서 그 자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그랬었나. 그렇지만 여전히 모호했다. 마치 동화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결국 코르보라는 남자는, 그제서야 타인을 해하는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기다리고 있어요, 코르보. 에밀리가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네요. 항구에서, 궁에서, 골든캣에서, 술집에서. 피에 절은 당신이 돌아오면, 그 아이는 평소대로 태연하게 말할 거에요. ‘코르보, 나랑 칼싸움 해요!’라고요. 아니면 수줍게 그 그림을 보여주겠죠. 그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소콜로프는 행실이 좋지 않지만 뛰어난 화가라서, 가끔 그에게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할지 말지 고민하곤 했어요.”

사실 그는 약간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소녀와 만났을 때, 그 아이는 반 년 전과 똑같은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그 아이를 안고 전력질주 했을 때, 아이의 옷에는 남자의 옷에 들러붙어 있었던 먼지가 옮겨 붙었다. 얼마 후 등에 붙은 먼지를 알아채지 못한 아이를 보면서 남자는 생각했다. 황궁에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먼저 새 옷을 만들도록 해야겠구나, 라고. 그 다음에는 커다란 케이크를 만들어서 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화내겠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하루 정도는 아이를 위해 희생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 다음에는 보트를 만들어서 새뮤얼을 스승 삼아, 던월에서 제일 가는 여자 항해사로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뮤얼에게는 너무 많은 빚을 졌다. 보트 위 생활에 익숙해진 그 사내에게 약간이나마 편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다. 칼리스타는 짧은 시일이었지만 에밀리의 또 다른 어머니이기도 했다.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그녀는 항해를 해보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도 에밀리의 배를 타볼 기회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자신을 못 본 채 해줬던 커나우의 조카이니만큼 특히 신경을 써 줘야 할 것이다. 리디아, 월레스, 세실리아, 그 세 하인들 역시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도움을 많이 줬다. 비관적인 세실리아에게는 특히 더 신경을 써 줘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아직 쓸모 있으며,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에 족적을 남길 그런 인간이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다. 만약 피에로에게 세실리아의 마음을 전한다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 지도 궁금해졌다. 일단 소콜로프와 다투겠지만, 그가 다시 과학원에 돌아온다면 역병 치료제의 개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자신에게 장비와 복수의 동기를 제공해준 그 세 사람, 펜들턴과 마틴, 해블락에게도 감사의 표시를 마땅히 해야 했다.

잠깐, 하고 남자는 멈칫했다. 왜 그들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극히 당연한 행동에 왜 이제와 의문을 가지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왜지? 아마도 너무 피곤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 동안 쉴 틈이 거의 없었다. 그저 발자국을 덜 내는 데에 급급하고, 기절한 이들과 시체를 운반하고, 아이를 포옹할 때에도 옷에 지저분한 피라도 묻을 까봐 조심스러워야 했다. 마음을 놓고 남을 대하는 것 따윈 꿈도 꿀 수 없었다. 긴장, 긴장, 긴장. 끝도 없이 긴장을 하니 신경이 예민해질 만도 했다. 이제 배신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먼 옛날 어렸던 그녀가 읽어줬던 동화의 마지막처럼,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그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증오할 필요도 더 이상 없었다. 그러니 조금 더 행복한 생각을 해야 했다. 이 고통스러웠던 나날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아도 되도록.

“새뮤얼의 보트에서 내린 너는 지친 몸을 이끌고 술집으로 향했다. 모두들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홀로 여제의 복수를 위해 싸운 너를 기다리면서, 명예의 회복을 자축하기 위해서. 그들의 환호를 맞이한 너는 그 다음 어떻게 되었지?”

분명,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에밀리에게 따뜻한 말을 한 마디 건네고, 그림을 칭찬해주고, 다락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뉘이고, 하루를 곤히 잠든 다음에, 자신을 지켜보던 아이의 손을 다시 잡고, 그날 밤만은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했었다. 그간의 노고를 다루고도 거스름돈이 한참 나올 듯한 그런 행복한 기억이. 눈을 감는다면, 그 순간의 행복한 기억이 다시 재생될 것이다.

“이거 놔!! 이거 놔!! 놓으란 말야! 싫어! 가기 싫어!”

“에밀리 아가씨를 당장 놔 줘요!”

“칼리스타, 싫어! 가기 싫어! 코르보 어딨어? 코르보, 코르보, 어디 있어? 코르보!! 칼리스타, 내 손 놓지 말아줘요, 네?”

“에밀……아!”

“착한 아이로 있을게요. 말썽 안 피울게요. 역사 수업에 하품 안 할거에요. 편식도 안할거고, 칼싸움도 다신 안하고, 여자애처럼 얌전하게 지낼 테니까, 제발 끌고 가지 말아요. 싫어!!!”

“에밀리! 안돼!”

“엄마!! 아빠!!!”

콧잔등을 타고 내려오는 따뜻한 액체를 느끼면서 남자는 눈을 떴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광경, 기대하지도 않았던 절규에 느닷없이 몸에 오한이 인다. 그 바람에 손에서 미끄러진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깨진 파편 틈새로 흘러내린 것은 투명한 찻물이 아닌 시커먼 액체였다. 그의 눈꺼풀 속 세상에서, 한 소녀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무리 부르고, 기다려 봐야 결코 돌아오지 않을 그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흰 옷을 지저분한 먼지로 회색으로 물들이고, 까만 눈동자를 눈물로 적시면서. 그 손, 그 손을 잡았어야 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세게 붙잡았어야 했다. 자신의 손가락이 마디마디 부러지고, 으스러지고, 잘려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손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손을 놓쳐버렸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발작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온 힘을 다해 일어나려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아득한 현기증으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입을 벌렸다.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메스꺼움을 버티지 못하고 토하니, 그 바닥에는 붉다 못해 시커멓게 죽어버린 피가 흥건했다. 그는 스스로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어째서 이렇게 된 건가. 그는 연신 치밀어 오르는 울렁거림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잠시 그의 몸을 휘저었으나, 금새 그의 몸은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드디어 기억났군.”

어느 새 남자의 옆에 서 있었던 청년은 버르적거리는 남자를 흥미진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억양이라고는 일절 실려있지 않았다.

“코르보.”

바닥에 떨어진 심장이 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다. 남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고통스럽게 기침을 하면서 내장을 뒤흔드는 무언가를 토해내려고 애쓸 뿐이었다.

“코르보, 괜찮나요?”

남자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심장을 잡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코르보, 왜 저는 이것을 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요? 나의 심장, 나의 마음, 나의 영혼은 당신의 곁에 있을 때 비로소 평온해질 수 있었죠. 내 곁에는 적이 너무 많았어요. 하이람 버로우즈, 새디어스 캠벨, 많은 귀족들, 많은 군인들, 그리고 주시자들. 옥좌에 앉은 뒤로 나는 항상 평화롭게 잠들 수 없었어요. 내 곁에는 나를 지켜주고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옥좌 위에서는 드러낼 수 없는 은밀한 불평과 분노를 받아줄 사람을 원했어요. 아버지처럼 강해진 줄 알았는데, 아버지처럼 거침없이 행동해도 좋을 줄 알았는데, 철들면서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대담하고 과감하게 말을 했다가는 분명 그들은 그 혓바닥으로 나를 거침없이 음해했겠죠. ‘거 봐, 역시 여자는 저래서 안 돼’라고. 안 된다고? 여자라서 알지 못하는 거라고? 그렇지 않아. 나는 그들의 음해를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조금만이라도 더 시간이 있었다면, 더 노력했다면 그들의 기대를 기어코 깨부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자비로우면서도 엄격한 황제가 되려고 했어요. 에밀리한테 엄격하게 대하고, 호국경인 당신에게는 권위적으로 대했죠. 그러면서도 자신이 서 있는 발판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서, 저 바다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아서 항상 위태로웠죠. 당신에게서 평온함을 찾으면서도 정작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 당신에게 냉정하게 굴기도 했어요. 나에게 불만이 있지 않았나요?”

맹세하건데, 기필코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나의 여제이시여. 나의 세계, 나의 모든 것, 나의 빛.

“많이 힘들었죠? 이제야 난 이 말을 건넬 수가 있군요. 그 입을 잃고, 눈을 잃고, 차가운 심장만 남은 뒤에야 난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게 되었어요. 긍지와 명예를 내세우는 여제가 아닌, 당신을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비로소 말을 걸 수 있게 되었어요. 호국경으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왔던 당신을 걱정할 수 있었어요. 힘들었죠?”

아닙니다.

“당신의 벽 너머를 들여다보아야 했어요. 이방인이었던 당신의 고충을 좀 더 이해해줘야 했어요. 호국경이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평생을 홀로 가야 했던 당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야 했어요. 제국을 통치하고, 국민들을 보살피는 자로 태어난 나는, 결국 바로 곁에 있었던 당신의 마음만은 들여다보지는 못했군요. 미안해요, 코르보.”

심장은 조용해졌다. 남자는 느닷없이 불안해졌다. 그의 귓가에서 마법의 흔적들과, 은밀한 비밀을 속삭였을 뿐인 심장이 어찌도 이리 자신을 애태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마디라도 심장의 말을 더 듣고 싶었다. 아무리 사소하고 하잘 것 없는 한 마디라도 좋았다.

“코르보.”

청년이 남자에게 말을 건다. 남자는 절박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고, 청년은 그의 눈에 담긴 말을 읽었다.

“많이 혼란스럽나? 네가 꿈꾸던 것들이 전부 허상인 것 같아서 불안한가? 전부 거짓은 아니다. 적어도 일부는 진실이었어. 그렇지만 나머지 일부는 그 진실들을 완벽하게 짓뭉개버려 파편조차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지. 인간은 가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체험하면 그것을 도피하지. 그건 자연스러운 거야. 난 그런 너희들에게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너는 그 심장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술잔을 들이키고 피곤함이 엄습한 그 순간에도, 그것이 그저 며칠 간 겹친 피로에 취기가 더해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고문에 약해진 몸이었기에, 약간의 술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지. 흐려지는 시야에도, 여자아이의 그림을 구경하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던 권태에도 너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다리가 평소보다 쉽게 꼬인 것도, 생소한 메스꺼움, 점차 심해지는 두통도 너의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저 너는 모든 것이 복수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 끝날 작은 소동이라고 생각했겠지. 침대 앞에서 쓰러진 순간, 독이 너의 온 신경을 불사르고, 마비시켰던 그 순간에도 너는 어찌된 일인지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지. 마룻바닥 위를 버르적거리면서 목구멍을 넘어오는 비릿한 것을 토해냈을 때, 그저 과음을 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려고 했겠지. 그렇지만 그 손바닥을 물들인 것은 독에 중독된 너의 피였다. 그래, 바로 지금 너처럼.”

그럴 리 없었다.

“나의 코르보. 수수께끼를 하나 내 보자. 그 독은, 도대체 누가 탔을까?”

공허에는 정적만이 흐른다. 고래는 여전히 저만치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 나의 코르보여, 친애하는 친구. 결국 너는 이렇게 되었군. 아무것도 의심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깎아내리고 모든 것을 합리화시킨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온 어떠한 부당함도 마땅히 감내하지. 타인만을 위해서, 이것이 공공을 위한 절대적인 선(善)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의 희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마치…나의 그 추종자들처럼 말야. 그래, 왕당파의 명령에 순종하며 여제를 위해 복수하는 주제에, 백성들 또한 배려해야 하는 호국경의 의무를 다하려, 최소한의 희생과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려고 그 몸을 혹사했다. 너의 몸의 상태를 알고 있었나?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6개월에 걸친 고문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나? 필멸자여, 너의 몸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 몸에 가득하다고 믿었던 체력과 정열은 나의 마법과 그 의지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지. 캠벨의 얼굴에 낙인을 찍은 순간, 소녀를 다시 안은 그 순간, 무도회에서 태연하게 음료수를 들이키던 그 순간, 이미 너의 몸은 반쯤 시체나 다름없었다. 흔히 죽은 부자는 산 빈자를 부러워한다고 하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은 최우선의 가치이자, 어떤 것으로도 교환할 수 없는 불변의 가치야. 그렇지만 너는 그 의무감에, 어린 시절부터 너의 세계를 짓눌러온 세뇌에, 던월 탑에 박제되어 살아온 20년의 세월에 그 가치조차도 망각하고 있었어. 그리스톨의 땅에 서서, 던월의 영혼을 가지려고 했지만 여전히 너의 마음은 서코노스를 갈구하고 있었지. 여제가 말한 대로 그 벽으로 인해 그것조차도 보지 못했지만 말이지. 흥미로운 녀석이야, 참으로. 그래서……스스로를 억누르고 썩혀가면서 얻은 게 있나?”

조롱하지 마.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하지. 독에 중독된 너는 그 다음에 어떻게 행동했지? 대답을 해보게, 친구여. 이미 그 답을 너는 알고 있어.”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초점을 잃어가는 그의 눈에 비춰진 모든 것들은 희미하게만 보였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네 사람의 형체는 물 속에 잠수해있기라도 한 마냥 흐릿했다. 바닥에 드러누워 그는 간신히 그는 손을 움직였다. 이봐, 아직 살아 있잖아. 해블락이 말했고, 독이 아직 덜 든 모양이군요. 곧 있으면 끝날 겁니다, 라고 새뮤얼이 말했다. 그래, 새뮤얼이었다. 그를 격려하고, 소녀에게 물길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퉁명스러울지언정 속내는 따뜻해 보였던 새뮤얼이었다. 마틴도, 펜들턴도, 전부 그가 아직 살아있음에 놀라워했다. 죽어가고 있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전부 똑똑히 들렸다. 그래, 시킨 대로 그는 적당히 처분하도록 해라, 알겠나 새뮤얼? 해블락이 말했을 때, 남자는 비로소 자신이 엄청난 음모 한가운데에 휘말려 있음을 깨달았다. 독이 머리까지 닿은 탓에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도 그의 머리는 현실을 한참 부정했다. 자신을 도와준 이들이었다. 무뚝뚝하고 오만했지만, 제국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뭉친 이들이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해야만 했는데, 그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신음과 피만 흘러나왔다. 눈앞이 부옇던 탓에 그를 내려다보는 새뮤얼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세 관리들은 그에게 흥미를 잃은 듯 했다.

코르보, 라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네 형체들은 그 말에 과민하게 반응했고, 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옆으로 머리를 돌렸고, 검고 하얀 형체를 알아보았다. 코르보? 이번에는 겁에 질린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에밀리? 뭐 하는 거니?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쿵, 쿵, 쿵. 뭐하는 거에요? 코르보한테 뭐하는 거에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남자의 모습을 목격하고, 지금까지 그녀를 괴롭혀 온 익숙한 악몽 속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 소녀의 목소리가, 그의 안의 무언가를 일깨웠다. 이성도, 지성도 아닌, 짐승의 본능에 가까운 무언가가 그의 몸을 채찍질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신경 마디 하나하나가 그의 내부를 쥐어짰고, 다시 피를 심하게 토했다. 그렇지만 남자에게 지체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저 저 눈 앞의 소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그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았다. 주위에서 무어라고 소란이 일어났지만,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앞에 서 있는 작은 형체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코르보, 라고 다시 소녀가 말을 했다. 코르보 씨? 라고 여자가 말을 했다. 소녀에게 왼손을 뻗는다. 피로 물들어 낙인이 감춰진 그 왼손을. 입을 열어서 무어라고 말해야만 했다. 도망쳐, 라고 말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뒤통수에 차가운 금속 감촉이 느껴지면서 찰칵,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 것도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어머,라고 여자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와 감각을 잃어가는 손가락 때문에 무엇이 ‘어머’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앞의 두 여자라도, 적어도 여자아이라도,

탕.

그래. 그제서야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불쾌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물을 머금은 것처럼 무거운 손끝, 6개월 전 고문으로 뽑혀나가, 미처 완전히 자라지도 못한 흉한 손톱이 달린 손끝을 힘겹게 들어올려, 천천히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제법 오랫동안 깎지 못했던 지저분한 턱수염을 거쳐, 수척해진 관자놀이, 길고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칼을 헤쳐나가는 손가락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손끝이 후두부 속으로 깊숙히 난 상처를 파고들어 부서진 두개골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만진 순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남자는 손을 뺐다. 숨을 심하게 헐떡이며, 남자는 손가락에 묻어 있는 것들을 확인했다.

이제야 자신의 뒤통수를 적시던 따뜻한 액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에 흥건했던 비릿한 바닷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자신의 품 안에서 조용히 고동치며, 그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심장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떠올렸군, 코르보. 진실이란 게 많이 잔인하지.”

간신히 팔로 체중을 지탱하던 남자는 다시 바닥에 엎어졌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숨을 쉴 수 없었다. 남자는 갑자기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었던 책무는, 지금은 두 손으로 들어야 간신히 다닐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금방이라도 꺾일 듯한 두 다리를 재촉하고, 무너질 듯한 어깨를 간신히 추스르면서 걷는데도, 실린 무게는 점차 무거워지기만 했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들판을 걷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부쩍 큰 지금 보니, 그 들판은 알고 보니 밑바닥을 알 수 없고 끝조차도 한없이 멀어 보이는 늪이었다. 얕은 시내인줄 알았던 물줄기는 어느 새 조각배로는 건널 수 없는 대양이 되어 있었다. 이미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왔지만, 포기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많았다.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짊어진 채로,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이루어 주면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인간이었다. 호국경은 그저 명함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어린 시선 탓에 손에 든 것을 놓아버릴 수도 없었다. 놓아버렸다면 손은 자유로워졌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손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또 다른 사람들이 그의 보호와 충성을 요구하며 안길 것이 뻔했다. 그가 안아줘야 할 사람들은 끝이 없었지만, 그를 안아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삶은 체스의 말처럼 기분 내키는 대로 쉽게 엎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를 체스의 말처럼 다루었고, 그는 체스의 말처럼 판 밖 어딘가에 쳐박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이름을 울부짖으면서 자신의 손끝을 움켜쥔 작은 온기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식어가는 자신의 몸뚱아리에 온기를 나눠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그 손, 식은땀을 머금은 작고 보드라운 손. 남자는 그 손의 주인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피 속을 도는 독이 내장을 휘젓고, 머리에 박힌 총알이 그나마 저항하던 생명의 저항을 짓뭉개는 와중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6개월간 찾아 헤매었던......아니, 10년 동안 품고 있었던 그 손을.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그 손이 자신을 놓는 순간, 그 아이와 영영 만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과 후회감이 엄습했다. 그는 자신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죽음 그 자체에 미친 듯이 발악을 했다. 그 어린 아이의 눈동자가 충격과 공포도, 비탄도 아닌 공허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그토록 안타까울 수 없었다. 감방 속에서 산 채로 썩어가면서도, 인간의 형상을 한 쥐들이 그의 피와 살을 파먹는 순간에도, 감방의 냉기가 그의 상처를 헤집는 순간에도, 그 작은 빛은 그를 찾아 헤매고 있었고, 그 역시 그 작은 빛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미 끝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 그의 생명을 붙잡게 만드는 의지를 부여한 것이야말로 바로 그 작은 소녀, 에밀리 칼드윈이었다.

“그래서, 그 결말이 고작 이거였나? 너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달린 삶이 고작 그거만을 위해서, 이런 결말을 맞기 위해서였나?”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던 남자는, 걸리적거리는 의자를 박차고 번개같이 튀어 오른다. 테이블이 뒤엎어지고, 찻잔과 주전자는 포석 위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다. 신경을 거슬리는 그 소리조차도 안중에 없다는 듯이, 남자는 청년을 덮친다. 낯설기 그지없는 검은 옷 속에서 익숙하게 접이식 칼을 꺼냈다. 파르스름한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칼자루를 움켜쥐고, 남자는 청년을 칼로 내려친다. 청년은 약간 즐거워 보였다. 청년의 얼굴에, 손에, 몸에 튀는 붉은 선혈은 청년의 것이 아닌 남자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개의치 않고 남자는 청년을 미친 듯이 찌르고, 찌르고, 또 찔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간신히 그는 손을 멈췄다. 자신이 뭘 한 것인지를 깨닫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아래에 누워있는 것은 청년이 아닌 한 여자였다. 그 여자의 익숙한 모습을 알아본 순간 그는 숨을 멈췄다. 너는 그녀를 구할 수 없어, 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남자는 피로 물든 포석을, 피로 물든 여자의 몸을, 그리고 여자의 몸에 나 있는 구멍을 바라본다. 본래 심장을 담아놓았을 그 구멍 속에 보이는 것은 붉은 살과 창백한 뼈로 감싸인 공허뿐이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배에 난 깊은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액체가 흘러나온다. 피라고 하기에는 너무 검고, 역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린내가 심한 액체다. 돌바닥을 서서히 검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그 구멍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남자는 천천히, 그 망가진 손을 들어 여자의 상처를 막는다. 여자의 몸에 온기라고는 한 올만큼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의 큰 손으로도 여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막을 수 없었다. 너는 그녀를 구할 수 없어, 6개월 전처럼. 다시 누군가가 말했다. 그건 청년이 한 말이 아니었다. 여자가 한 말도 아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자신의 심장이 걸어온 말이었다. 사실이었다. 난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칼을 쥐고, 칼 끝을 자신의 몸 쪽으로 향하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칼 끝으로 뼈를 가르고, 근육을 헤치는 와중에서도 그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람은 아픔을 느끼기 때문에 쉴 때를 알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답게 있을 수 있는 거라고. 그렇다면 그는 뭘까? 인간인가? 인간이라면 무엇이 그의 고통을 막는 것일까? 고통은 이런 것이 아닐 터였다. 좀 더 구체적이고, 뿌리깊으면서, 강렬한 무언가였다. 호흡을 할 때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희미한 바람을 얼굴에 맞을 때마다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고 갈갈이 찢어버리고 싶게 하고, 그리고 그것조차도 과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고통과 죄책감을 가장한 광기였다.

칼 끝은 마침내 바라던 것을 찾는다. 남자가 칼을 뽑아내자 붉은 액체가 여제의 시신 위로 쏟아졌다. 자신의 심장을 꺼내어 여자의 몸 속에 집어넣는다.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면,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저 멍하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면, 이까짓 맥동치는 것은 자신 대신 그녀에게 훨씬 더 어울리리라는 생각뿐이었다.

“코르보, 그만해라.”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치 그 말이 들리지도 않은 것처럼, 하던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의 동작은 지루한 작업을 반복하는 장인처럼 기계적이었고, 그 얼굴 또한 어떠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코르보.”

청년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자, 그것만으로 여자의 시신은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렸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붉은 핏자국만이 재스민 칼드윈이 거기에 죽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렇지만 그것조차도 검은 액체로 인해 가려졌고,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남자의 동작이 멈추었다. 지저분한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은 흔들리고 있었고, 그 손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 안의 심장은 그 아귀힘에 조금씩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제 충분한가?”

남자는 대답 대신, 번개같이 청년에게 덤벼들더니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돌같이 억센 손아귀로 졸리고 있었는데도 청년의 무표정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검은 눈은 광인의 푸른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벌써 6개월 째다, 코르보. 네가 그 산 자의 심장을 죽은 여제에게 끼워넣고, 그녀가 다시 숨쉬기를 기대하는 시도를 시작한 지 6개월이야. 이 순간이 처음인 것 같은가? 천만에. 잠을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있을 때에도, 어느 곳 어느 때에 있든 간에, 너의 정신은 던월 탑의 그 정자에 머물러 있었지. 가장 행복하다고 여겼던 그 순간에 영원히 머물러서, 현실의 무게에 압살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빌면서 말야. 그리고 악몽이 현실로 다가올 때마다, 너는 그 검으로 자해를 하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서 자신 대신 어미를 딸 곁에 돌려놓으려고 했다. 이 불쌍한 것아, 여제는 죽었다. 재스민 칼드윈은 6개월 전, 바로 이 장소에서 하이람 버로우즈의 명을 받은 암살자들에게 시해되었어. 너는 그 누명을 송두리째 뒤집어쓰고 감옥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너는 탈옥했고, 납치당한 여제의 딸을 구출했지. 너를 생매장하려고 든 이들은 전부 너의 손에 의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하이람 버로우즈 역시 너의 손에 죽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긍지를 느꼈던 권력을 무너뜨리고,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없을 굴욕을 맛보게 한 뒤에야 그 목을 부러뜨렸지. 새로운 여제의 즉위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은 너의 그 손에 의해 무너졌다. 그리고 왕당파는 그 대가로 너를 살해했다. 이것이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일이다. ”

남자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흥미로운 사실을 가르쳐주마, 코르보. 부대자루 속으로 들어오는 찬물의 감촉을 기억하나? 물이 폐 속으로 차올라, 충만했던 공기를 몰아내던 질식의 때를 기억하나? 밝은 태양빛도, 술집의 등불도, 부표의 조명도 모두 너를 두고 어둠 위로 떠오르던 고독의 순간도 기억에 남아 있겠지? 물론 그럴 것이다. 나는 네가 보던 것을 전부 알고 있으니까. 너는 총알을 맞는 순간 죽었을 거라고 생각할 게다. 그렇지만 내 각인을 받은 자들은 나의 힘으로 과분하리만치 많은 것을 제공받지. 그래, 이를테면 그 맹렬하고 치명적인 생명력 말이다. 너는 독약을 먹은 순간 이미 죽었고, 머리에 총알을 맞은 순간 죽었으며, 폐를 메운 바닷물로 질식사했고, 겨울바다의 냉기에 동사했다.”

툭, 툭,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의 시야를 붉은 핏줄기가 가로지른다. 그의 머리를 꿰뚫은 총알은 그의 사고를 무너뜨리고 꿈과 현실의 혼탁한 반복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치명적인 독극물은 그의 내장을 뒤틀고 있었으며, 떨쳐낼 수 없는 바다의 냉기는 한 모금의 생기라도 되찾기 위해 부질없이 노력하는 그의 몸을 식히고 있었다.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타인을 위해 바쳐온 모든 삶이, 흘려온 모든 피들이, 고작 그런 시시하고 암담한 결말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서코노스의 바다. 그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0여년의 삶 속에서 그가 서코노스의 바다에 가 본 횟수는 고작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과 그 아름다운 바닷가를 걷는 꿈을 계속 꾸곤 했다. 햇볕으로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그런 모래사장과, 그 위를 걸을 때마다 발목 언저리에서 잘박거리는 바다의 소리, 시선을 먼 곳으로 던지면 보이는 에메랄드 빛 원해, 바다에 내리쬐는 따가운 여름 햇살에 질린 이들을 위해 마련된 숲들,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나오는 포도 농원들. 끝없이 단조로운 회색, 무기질적인 직선과 직선이 반복되는 던월의 도시에서 10년도 훨씬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계속 그 장면은 눈 앞을 어른거렸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성의 기둥에 기대어 그 광경을 그려본 횟수는 이미 셀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 청아한 세계를 다시 볼 날도 올 것이다, 라고 되뇌었다. 던월에서 새로 얻은 것은 많았지만,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아직 봐야 할 것도 많았고, 해야 할 것도 많았다. 소녀의 손을 잡고 그 바닷가를 걷고 싶었다. 죽는 것은 싫었지만 어차피 올 것이 죽음이라면, 그리고 어차피 태어났다면, 보다 많은 것을 이루고 가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는 바다 밑바닥에서 퉁퉁 불어터지면서 바다장어에게 먹히자고 태어난 게 아니었을 터였다.

손아귀의 힘이 풀어지더니 남자는 손을 놓았다. 그리고 풀썩 주저앉는다. 방관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곁에 쪼그려 앉고, 손가락으로 수그린 남자의 턱을 들어올린다. 필멸자의 눈은 초월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되 아무데도 보고 있지 않았다. 방관자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남자를 동정하는 듯한 구석이 있었다. 방관자는 말했다.

“나의 능력을 받은 이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지.”

“이들은 무언가를 절실하게 갈구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그 것을 자신의 품 안에 안겨주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직접 쟁취하기를 선택한다. 설령 그 와중에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말야. 나를 매료시키는 너희들의 특성은 그 극한의 주체성이자 예기할 수 없는 이기성이다. 그들은 나의 간섭조차도 싫어하지. 왜냐하면 내가 안겨준 선물은 너희의 소유가 아니며, 내가 언제라도 거두어갈 전당포의 물건과도 같으니까.”

“그렇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나약하고 유한함을 타고났기에, 혼자서는 그 갈망을 충족할 수 없어. 모순적이지.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이어받는 자들을 찾아, 그 능력을 공유한다.”

“능력뿐이던가? 사상, 의지, 감정, 이해, 소망. 능력의 계승과 동시에, 낙인 찍힌 자들의 정신 역시 그들에게 계승된다.”

“다우드. 딜라일라. 그 중에서도 나의 흥미를 많이 끈 자들은 전부 그랬어. 고래잡이, 브리그모어의 마녀들.”

“그러나 너는 혼자였다.”

“너는 모든 것을 불사르고 파멸하는 그 순간까지, 철저하게 너만의 힘으로 그 동안의 일들을 감당해왔다.”

“그래서 너는 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너의 생각은 틀렸어. 코르보, 너는 나와 만난 그 순간, 나의 낙인을 물려받은 그 시점에서 그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법이란 인간의 갈망의 구현.”

“낙인을 받은 자의 소원은 추상적이지만, 나의 힘을 빌리고 나서야 비로소 이 세상에 물질적인 형태로 구현된다.”

“너의 갈망은 복수. 자신을 침범한 세계의 파괴. 동시에 네가 원하던 세계를 복귀시키는 것.”

“그러나 너는 자신의 세계를 벽으로 가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벽을 한칸한칸 쌓아 올린 너조차도 볼 수 없는 견고한 성채. 벽 너머를 내다볼 수 없는 너는 자신의 세계를 알지 못했기에, 또 다른 것을 너의 세계로 지목하고 대체했다.”

“너와 만났을 때, 나는 말했지. ‘내가 직접 주조한 이 심장이 너를 나의 성소로 이끄리라’고.”

“확실히, 나는 심장 속에 여제의 영혼을 묶어놓았지.”

남자의 눈이 한 순간 크게 흔들렸다.

“대체물은 곧 여제였다.”

“다시 한 번 말하마. 너의 갈망은 세계의 복귀. 그러나 너는 그 세계를 볼 수 없기에, 여제를 대체물의 세계로 삼는다. 흑마법을 얻은 너는 즉시 너의 갈망을 이 세계에 구현한다. 내가 준비해 놓은 것은 여제의 혼. 여제의 심장. 매개물은 너의 마법과 너의 생명.”

“너는 자신의 생명을 쪼개어, 마법으로 다듬은 뒤 그것을 여제의 심장에 불어넣었다.”

“능력이 아닌, 너의 생명 말이야. 암살자가 그 검으로 여제의 생명을 빼앗은 순간부터, 너는 세상을 저주하고 너 자신 또한 저주했다. 그리고 그 구덩이 바닥에서 너를 지켜주던 보호막이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지. 6개월 간 끝없는 자학과 자책을 계속되었어. 이미 오래 전부터 금이 가 왔고, 마침내 산산조각 나버린 너 자신을 맞춰볼 유일한 기회는 바로 그 세계를 되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너는 그녀를 구할 수 없다’, 그 말을 한 것은 너였고, 그것을 부정한 것 역시 너였지.”

“너의 마법으로 말미암아 되돌아온 여제의 반편 영혼은 너의 복수심과 평온을 되찾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불완전한 반편 생명 속에서 끊임없는 추위에 시달려야만 했지.”

왜 이렇게 추운 거죠? 심장의 물음이 떠오른다.

“그리고 여제의 영혼은, 여제가 가장 애타게 바라던 이의 생명이 고갈된 뒤에 비로소 안식을 찾겠지. 즉 너의 죽음이야말로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열쇠였다.”

“축하한다, 코르보. 네가 연모하던 이는 이제 안식을 찾게 되었으니, 이제 그녀는 그녀의 복부를 관통하던 검의 고통, 죽은 자의 냉기에서 영원히 해방된 것이다.”

남자는 방관자의 빈정거림에 무어라 대꾸하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그 입에서 말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남자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여제의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고동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던 기괴한 흉물은 이제 완전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바닥에 가득한 검은 액체는 희미하게 넘실대면서 그 심장을 천천히 때리고 있었다.

“가엾은 것아. 20년 가까이 던월의 탑에서 길들여지면서 스스로의 세계조차 상실하고, 이제는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그 결여를 메우려고 한 것이냐? 너의 언행과 생각을 전부 부정하지는 않겠다. 여제를 지키려 한 것도, 그녀의 딸을 지키려 한 것도 전부 진심이었으니까. 지금 상황에 처하지 않았더라도, 너는 그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심장이라도 바쳤을 거야. 독약을 마시라면 독약을 들이켰을 테고, 자살을 명령 받았으면 기꺼이 그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겠지. 그렇지만 정말로, 지금 이 결과로 만족하나? 너의 앞에 놓여졌던 지금까지의 패들에 네 선택권 따윈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 이것은 네가 하는 도박이 아니다. 너라는 장기말이 마음대로 굴려지고 버려지는 지루하기 그지없는 게임에 불과해. 영예의 이름으로, 긍지의 이름으로, 복수의 이름으로, 호국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름을 걸머진 채로 달리고 달린 끝에 무너진 너 자신을 봐라. 모든 것을 억누른 끝에, 그 무게에 압살당한 너 자신을 봐라. 모든 이를 위해 싸웠지만 남은 것은 머리에서 피와 뇌수를 흘리며, 뒤틀린 내장에서 피를 쏟고, 추위에 새파랗게 질려 죽어버린 너뿐이지. 그럼에도 너는 끊임없이 자책을 하고 스스로의 심장을 파내는 것에 골몰하고 있어.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실책 때문이고, 자신의 무능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야. 정말로 이 것에 만족하는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관자 역시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장난과도 같다, 코르보. 내가 보기에 너의 일생은 마치 하나의 지독한 장난과도 같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든, 웅덩이 속으로 쓰러지든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너를 보고 웃을 것이다. 너 자신의 고통을 다른 이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했나? 천만에. 그들은 너의 고통에는 무관심해.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타인의 내면이나 속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타인이 보여줄 순간적인 유희에 집중할 뿐이지. 그럼에도 너는 그 방관자들을 위해 온 몸을 던졌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 불행한 천재가 만들어준 장비를 몸에 차고서, 마법으로 신체를 유지하며, 언젠가 스러질 모든 것들을 위해 너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 이 모든 것……너의 모든 행동원리 하나하나는 내 흥미를 철저하게 끌고 있어.”

“재미있어, 코르보. 너는 숨을 쉬지 않게 되고, 온기를 잃은 지금조차도 나를 매료시키다니.”

“이대로 놀이를 끝낼 참인가? 장난감과도 같았던 너의 짧은 삶을, 그들이 바라던 바대로 끝을 맺을 텐가? 사나운 바다장어와 무관심한 해류가 너의 시신을 산산이 흐트러뜨려놓아, 마침내 네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조차도 사라지는 그 순간을 바라는가? 너를 궁지로 몰아놓은 자들, 너를 음해하고 배신한 자들, 너를 사랑하던 자들. 너를 알던 이들이 사라지고 세상과 너는 완전한 망각을 맞이한 가운데, 공허 속에서 행복한 추억의 파편을 긁어 모으는 덧없는 순간을 반복할 텐가?”


남자의 눈이 서서히 초점을 되찾기 시작한다. 생기 잃은 눈 너머에서 무언가가 이글이글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얼마나 슬픈 운명인지. 사랑하던 여제는 죽었고, 모든 이들은 너를 시해자로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너’는 진실을 알고 있지. 그렇지 않나? 이대로 바다 밑바닥에 누워서, 바보들이 여제를 구워삶는 것을 들으면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면, 우리가,”

방관자는 양 손으로 남자의 뺨을 움켜쥔다. 남자는 희미하게 신음했다. 초월자의 접촉은 무기력했던 망자의 몸에 서서히 통증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자신을 좀먹지만 동시에 생을 실감하게 하는 통증을.

“이 상황을 좀 더 낫게, 그리고 재미있게 바꿀 수 있을지 보는 건 어떻겠나?”

방관자의 손에는 그의 또 다른 얼굴이 들려 있었다. 방관자는 언젠가 어떤 과학자의 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과학자는 그의 모습에서 죽음을 보았다. 죽음을 본 과학자는 해골과도 같은 기괴한 가면을 완성했다. 그 가면은 여제의 복수를 위해 왕당파와 협력을 맺은 호국경의 또 다른 얼굴이 되었다. 방관자는 그 얼굴을 다시 호국경에게 돌려준다.


“이것은,”

“나의 선물이다.”


첨벙, 하고 남자는 검은 웅덩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파문조차 멎어들 즈음, 공허에는 오직 방관자와 무한한 폐허만이 남아 있었다.

“내 앞에는 두 가지 미래가 보이는군. 오물과 병마에 뒤덮여 몰락해가는 제국. 그리고 오욕과 곤경을 헤치고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는 제국.”

“그러나 어느 미래가 이루어지든 간에, 그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네가 있을 것이다, 코르보 아타노.”

그 말을 들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