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스아너드

까마귀 이야기 - 5화

오덕하라 2014. 7. 22. 00:50

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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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의식이 돌아왔을 때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깊은 잠에서 두들겨 깨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불쾌한 각성이었다.

지친 남자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누워 있는지, 앉아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까 전에는 선명한 아침해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도 확실치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안개 속에 도사리고 있는 산처럼 흐릿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지만, 너무나 지친 몸은 더 이상 그 이상의 사고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몸을 뒤척이려는 기력조차도 빼앗긴 채로, 그는 계속해서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한동안 비몽사몽 헤매고만 있었다. 이윽고 그의 코 끝에는 비린내 같은 것이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희미한 냄새에, 그리운 서코노스의 풍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덥고 건조한 여름과 녹색 그늘을 드리우는 포도나무들, 웃음파는 여자들과 사기꾼들이 모여 음담패설을 나누던 길거리가 떠올랐다.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보지 못한 광경이었는데도 왜이리 생생한지. 그다지 편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었음에도, 아직까지 그 남쪽 나라의 모습은 여전히 생생하기만 하다. 그리고...맞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특히 서코노스의 푸른 바다를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눈부신 여름 태양을 받아 새파랗게 빛을 내는 바다가 조용히 일렁일 때마다, 흰 해변가에 부딪히는 잔물결이 조용히 발목에 감겨올라갔다. 지금 그의 코를 간지럽히는 그 바다 내음은 그 파도가 발목에 감길 때의 부드러운 감촉을 너무나 또렷하게 떠올리게 했고, 지금이라도 손을 내밀면 그 물결이 잡힐 것만 같았다. 깊은 바다에서 밀려와 원래 차가웠을 그 물들은 뜨거운 햇볕에 따끈따끈하게 덥혀져 있을 것이다. 바닷물을 움키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내밀었지만, 손에 잡힌 것은 상쾌한 물이 아닌 축축한 공기 뿐이었다. 남자는 망설이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눈 앞에는 끝을 잴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허공만이 가득했다. 새파란 대기는 창백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남자는 체념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떨구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린 소년의 가느다랗고 길쭉한 손이 아닌, 거칠고 마디진 성인의 손이었다. 핏줄이 파르스름하게 돋아나 있는 그 손은 군데군데 생채기 투성이었고, 손톱 몇개는 다른 것들의 절반 정도밖에 자라있지 않았다. 무언가가 이상하고 낯설었지만, 한편으로 무척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 데자뷰를 떨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꽉 감았다. 그렇게 좋은 기억은 없었던 어린 시절이었는데, 이제 와서 그 남쪽 고향의 모습이 그토록 생생하게 떠오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코르보."

눈을 다시 떴을 때, 이제 그는 정자 한가운데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정자 밑바닥에 깔린 포석은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거의 허물어져, 그 틈새에 깔린 먼지를 비집고 잡초 몇 포기가 눈물겹게 돋아나 있었다. 다시 불쾌함이 느껴졌다. 그 이유나 근원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단지 느끼는 것 만으로도 머릿속이 싸해지고 손끝이 찌르르해지는 그런 불쾌함. 그는 눈만을 움직여 자신을 부른 사람을 쳐다본다. 소매가 헐어 있는 갈색 옷에 검은 바지를 입은 청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전부 새카맸다. 불쾌하고 섬뜩했다. 청년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건너편에 앉아,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어디서 만났는지 알 수 없었다.

"들게."

청년은 남자에게 차를 권한다. 어느 새 테이블에는 낡은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져 있다. 남자의 손에는 어느 새 찻잔이 들려 있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바다 내음이 나는 세상에 희미한 홍차 향기가 섞였다. 언젠가 그는 두 사람이 테이블에 마주앉아 다과회를 갖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 둘이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가 침침한 기억 속을 더듬으며, 두 남자는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불신과 혐오에 가득 찬 눈길로, 또 한 사람은 무관심을 가장한 흥미에 가득 찬 눈길로.

그리고 고래 한 마리가 그런 두 사람의 기묘한 신경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느긋하게 바다의 노래를 부르는 그 녀석의 몸뚱아리에는 선명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던월 앞바다에서는 그런 고래들이 포경선에 산 채로 박제되어 운반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남자는 그 고래들이 애처롭게 눈알을 뒤룩대는 것을 볼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억지로 감추곤 했다. 저 불쌍한 생물들은 스스로의 가혹한 운명을 알지 못하는 채였고, 그저 입을 벌리고 헐떡이면서 그 순간 자신들의 갈증을 달랠 물과 공기를 갈망할 뿐이었다. 그리고 도살장으로 끌려가, 마지막 남은 기름 한방울까지도 쥐어짜이고 나서야 물도 공기도 필요없는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메스꺼웠다. 그렇지만 그것도 이미 먼 옛날의 일이다. 마치 던월의 사람들처럼, 그는 그러한 광경을 보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광경을 볼 때마다 그의 마음 속 어딘가에는 깊고 가느다란 상처는 계속해서 새겨졌다. 그는 여전히 던월의 인간이 아니었다.

"친애하는 코르보. 그 동안 달리고 달렸지. 끝도 알 수 없는 길을, 언젠가 끝날 거라고 예상하면서 쉬지 않고 달린 느낌은 어떤가? 다다른 그 끝은 만족스러웠나?"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코르보가 누구였지. 무슨 끝을 말하는 거지.

"우리는 언젠가 여기에 돌아올 운명이었답니다. 그렇지만 예상보다 너무도 일찍 돌아왔군요."

그의 품 속에는 심장이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철사와 파이프, 작은 렌즈가 얼기설기 엮인 몹시 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심장. 그 심장은 자신을 잃은 남자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어온다. 이상하게도 그는 그 기괴한 물건에게서 포근함을 느꼈다.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었답니다, 코르보. 쉬고 싶었어요. 몹시 추웠답니다. 모든 것은 무너져가고 있었죠. 내가 기억하는 그 던월의 모든 것 말이에요. 그래도 미련이 남는군요. 그 아이의 목소리와 당신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답니다. 당신들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었는데."

심장은 무엇인가를 절절히 그리워한다.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놓아와야 했던 것들을. 남자는 가슴 한구석이 몹시 불편해진다. 청년은 부자연스러운 침묵을 지키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래라. 재스민 칼드윈이여. 비극의 여제여. 너는 그 바람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 여제로 즉위한지 20년도 되지 못해서, 암살자의 손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고, 그 죽음은 호국경을 제국에서 제일가는 불명예한 자로 만들어 버렸지.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 머리가 하얗게 물들 때까지 오래 살았다면, 에밀리 칼드윈은 강인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춘 숙녀로 자랐을 것이고, 제국의 혼란 역시 지금에 비하면 새발의 피 정도였겠지. 그렇다면 너희 셋은 확실히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국경은 어떤가? 호국경 역시 나이가 들 때까지, 여제를 지키기에 힘이 턱없이 약해져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 곁에 있었겠지. 제국의 심장, 던월에서, 던월의 심장인 탑의 궁전 속에서 두 모녀를 영원토록 지키면서. 이들 곁을 한시라도 떠나지 않고. 오직 충성만을 담아, 그 인간성을 끊임없이 절제하면서."

남자는 멍하니 찻잔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둘의 대화는 어딘지 기묘했고, 계속해서 한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상하게 머리 속 어딘가가 쿡쿡 쑤셨다. 무슨 손가락이 들어와서 머리를 헤집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놀랍도록 또렷하게 들려온다.

"칼드윈 대교. 선대 칼드윈이 건설한 거대한 다리지. 그 다리 위에서는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물자가 오가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을 유지시키고 있다. 예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황제들은 야망을 갖고 있었다. 모든 것은 먼지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역사에 새겨진 그들의 이름은 적어도 그들이 이룩한 문명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그들의 글자가 세상에 전해져 내려오는 한, 오래오래 유지되겠지. 칼드윈. 직계 후손을 남기지 못한 전전대 황제의 방계. 스스로의 주변성을 극복하고 던월에 자신들의 새로운 중심성을 각인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부들이 희생되었던가. 지금도 저 강과 바다 아래에는 인부들의 일부가 남아 있다. 해류와 물고기들이 대부분 파먹어 버렸겠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햇빛을 볼 날을 그리면서 나의 표식들과 함께 그 뻘 밑에서 잠을 자고 있지."

"그리고 당신은 소콜로프를 납치하기 전까지, 그 다리에 가 본적이 없었죠."

"20년 동안이다, 코르보. 서코노스의 무더운 땅에서 떨어져, 던월의 회색 세상으로 들어온 지 20년이다. 너는 거기서 어린 재스민 칼드윈에게 간택되었고, 일개 병사가 아닌 황제의 생명을 책임지는 호국경으로 임명된다. 외국인이 호국경에 임명된 것은 제국의 역사상 최초의 일, 유래없는 사건이었다. 이 스캔달에 귀족들도, 장군들도 경악했지. 그리고 너는 모두의 주목의 표적이 된다. 아직 기억하고 있겠지? 처음 그리스톨에 왔을 때, 너는 던월의 말은 서코노스에서 사용하던 그것과는 퍽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지. 던월의 중심인 탑 안에서 너는 독보적으로 튀는 존재였지만, 그 서코노스의 억양으로 더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말야. 어색한 말투, 과묵한 성격, 이국적인 생김새, 태생조차도 알 수 없는 비천한 평민 출신인 의존할 곳 없는 신세. 어쨌든, 호국경이 된 이상 너의 둥지는 탑이었다. 가엾은 까마귀여. 흰 성채에 둥지를 틀고 앉아, 너의 주군을 노리는 자들의 눈알을 쪼는 것이 너의 유일한 임무였지. 그리고 너는 던월의 밖 어느 곳에도 간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너는 호국경이니까."

어디선가 똑, 똑,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는데, 그게 몹시 신경을 긁었다.

"저와 당신이 처음 만났던 그 날을 기억하나요? 당신은 모든 것에 어리둥절해했고, 저는 아버지가 데려온 선물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죠. 성 안에서 자라온 저에게, 외국인으로서의 당신과 군인으로서의 당신, 그런 당신의 위태로움에 알 수없는 매력을 느끼고 만 것이죠. 처음에는 그런 철없는 호기심으로 시작했답니다. 그것조차도 당신에게 상처가 되고 몹시 무례하다는 것을 깨닫기엔, 아직 그 때 저는 너무 어렸죠."

"순진한 소년이었지. 그렇지만 검을 손에 쥔 그 순간만큼은, 너는 어떠한 귀족도 군인도 심지어 황제마저도 무시할 수 없는 자가 된다. 돌개바람처럼 상대방을 몰아붙여, 한 순간의 빈틈이 보이는 순간 상대방의 심장을 꿰뚫는 그런 괴물같은 존재. 너를 무시하고 깔보던 눈동자들은 선대 호국경과 너를 대련시킨 날, 경계와 경악의 눈동자로 변했지. 그렇지만 너는 검과 소녀의 환호에 정신이 팔려 그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당신의 어리숙함에 호기심을 느꼈고, 다음에는 당신의 날카로움에 정신을 빼앗겼답니다."

"호기심, 서커스 속 미지의 존재를 바라보는 눈길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사심도 계산도 없는 순수한 호의를 받았던 건, 네가 기억하는 한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순간 소년은 소녀에게서 일종의 안식처를 발견한 거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저렇게 말이 없는 걸까? 좋아하는 음식은 뭘까? 서코노스는 어떻게 생긴 곳일까? 얼마나 해가 세면 얼굴이 저렇게 그을린 걸까?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저는 당신을 만날 때마다 질문을 퍼붓곤 했죠. 그리고 당신은 서툰 던월의 말로 그것을 설명하다가,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라치면 이내 얼굴을 붉히곤 했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말을 흉보는 귀족들을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어요. 나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거든요."

심장에게서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한 사람은 의자에 앉아서 책을 또박또박 읽고, 또 한 사람은 꼿꼿하게 서서 그 발음을 따라하던 그 순간을 되새기기라도 하듯이.

"유일한 안식처다, 코르보. 재스민 칼드윈과 에밀리 칼드윈. 그리고 그들이 나고 자라서 죽음을 맞을 던월 탑. 그곳이야말로 던월 한가운데에 떨어진 이방인에게 있어서 마음을 위탁할 유일한 장소였다. 이방의 땅에서 너는 많은 것을 배웠지 않나? 그리스톨의 말, 암살 기술, 첩보 기술, 그리고 궁중 예절."

이번에는 꼭 티비아식 목조르기를 보여주세요! 라는 소녀의 환청이 들렸다. 분명히 자신에게 한 말이었지만, 그것을 어디서 들은 건지 영 가물가물했다.

"당신과 다과회를 가졌을 때 일이 기억 나시나요? 당신은 아무 생각없이, 평소에 하던 대로 과자 접시에 손을 가까이 댔죠. 옆의 하녀가 눈썹을 찌푸리는 것을 본 저는 당신의 손등을 한대 쳤답니다. 어리둥절해하는 당신에게 본보기로 집게로 과자를 옮기는 모습을 시범삼아 보여줬죠. 어물어물 저를 따라하는 당신의 모습이 어찌나 우스웠던지. 저는 깔깔 웃어버렸고, 당신은 잠시 겸연쩍어하다가 저를 따라 웃었죠. 행복한 시절이었죠. 권력도, 권모술수도 없는 순수한 시대였어요."

"황제들이 역대 호국경을 그리스톨 출신으로 선택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땅, 혈통에 집착한다. 그리스톨 속 던월의 땅을 밟고 있기에, 호국경들은 숱한 위협 속에서도 끊임없는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너는 아니었지."

남자의 앞을 잠시 서코노스의 푸른 하늘이 스치고 지나간다. 맞아. 그 하늘을 장장 20년 동안 보지 못했다. 그가 고향 땅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에는 겨울이었고, 태양은 구름으로 가려져 하늘은 온통 흐렸다. 겨울의 서코노스는 던월 쪽에 가까웠다. 아주 희미하게, 시체처럼 굳어만 있었던 그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움찔거렸다.

"황제를 위해 그 강인한 무력과 생명을 바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호국경의 대의다. 제국의 정점에 위치한 이들을 수호하는 것은 곧 제국을 수호하는 것이지. 그런 임무를 위해 그 인생을 통째로 바친다는 것은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희생할 만한 것이야. 목숨을 잃더라도 그들의 존귀한 명예는 길이길이 전해져, 후세의 사람들은 그 스러져간 이름없는 이들을 계속해서 기리겠지. 그리고 제국은 호국경들의 생명을 기반으로 삼아 그 힘을 키워나간다. 제국의 기반 밑에는, 호국경들의 시체가 무수하게 널려있지."

"당신은...예법에는 항상 서툴렀죠. 저보다 당신과 더 오랜 시간을 보냈던 에밀리는, 그래서 엄격한 황실의 예절보다는 당신의 소탈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에 더 큰 영향을 받았을 거에요. 당신이 에밀리와 저를 두고 해외로 나가 있었을 때, 저는 모처럼 그 아이와 평화롭게 차를 마시는 시간을 보냈답니다. 에밀리는 별 생각 없이, 접시에 담겨 있었던 과자를 맨손으로 집어먹으려 했죠. 저는 에밀리의 손등을 찰싹 때렸고, 에밀리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집게로 과자를 집었죠. 표정을 엄하게 굳히고 있었지만 속으로 어찌나 웃었던지..."

심장과 청년의 말이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한다. 심장은 남자의 젊은 시절을, 청년은 남자의 바로 지금을 보고 있었다.
남자는 흐릿하기만 했던 기억이 서서히 제자리를 되찾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왜이리도 두려운 걸까?

"제국은 곧 황제이며, 황제는 국가의 안정을 이끄는 뿌리와도 같은 자. 황제는 바다이고, 시민은 그 바다속 물고기."

"저의 눈을 피해, 에밀리와 나무 목검을 갖고 칼싸움을 한 것도 알고 있었어요. 검을 쥘 때마다 날카로워졌던 당신의 감각은, 그 순간만은 한없이 부드럽고 너그러웠죠. 안그런가요? 에밀리가 목검 끝으로 옷깃만 찔러도 뒤로 벌렁 넘어진 당신의 모습. 의기양양해하던 그 아이."

"호국경 한 명의 희생을 통해 수만 혹은 수십만, 수백만의 안위를 보전할 수 있다면, 이 정도야 '거저'에 가깝다. 코르보."

"당신과 에밀리만이 있고, 주위에 아무도 없었던 그 저녁. 노을은 빨갛게 지고 있었고, 에밀리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하품을 해댔죠. 당신은 그 아이를 선뜻 업고, 조용히 노래를 불러줬어요. 서코노스의 시골과 바닷가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가요였지만, 던월에서는 들을 수 없는 먼 땅의 노래였죠. 지금은 당신 나이 이상의 서코노스 사람들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그런 노래에요. 제 앞에서는 노래를 하지 않았더군요. 쑥스러우셨나요? 에밀리는 '못 부른다'고 말했어요. 그 말에 당신은 노래를 멈췄죠.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어요, 코르보.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원래 그렇게 솔직한 거에요. 에밀리는 그 말을 하면서도 당신의 넓은 등에 얼굴을 묻고, 얼굴을 비볐죠. 당신의 무거운 입이 열릴 일이 별로 없어서, 그 서툰 노래라도 더 듣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당신은 입을 다물고, 그냥 조용히 황궁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갔답니다."

청년은 심장의 회고를 잠시 듣고만 있었다. 찻잔을 들고 내용물을 마신다. 그런데 그 동작이 꼭 소꿉놀이를 하는 것마냥 가식적이다.

"실로 따분하기 그지없어."

남자는 갑자기 그 말에 세찬 분노를 느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워서 본인조차도 당혹스러워질 정도였다.

"이 군도들에 제국이 세워지기 전에도 무수한 왕국과 제국이 세워졌다. '그리스톨', '몰리', '서코노스', '티비아'라는 이름이 가장 큰 네 섬에 붙여지기 전에도 이러한 전통은 수없이 반복되었지. 그리고 정점에 위치한 자와 그를 지키기 위한 수호자들 역시 그 시절부터 반복되어 온 전통이었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그래서 그 수많은 문명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두 묻혔지. 던월의 밑에. 그리고 그 태고의 유적 밑에도 액받이의 희생으로 세워진 문명이 또 하나 잠들어 있어. 수 천년, 아니, 만 년쯤 되었나? 아무래도 상관 없지.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너희들은 지금의 시대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찰테니까. 70년도 되지 못하는 세월을 살지 못하는 자들에게 천년 전의 지혜를 말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30년이라는 짧은 젊음을 향유하는 이들에게 시간의 찰나를 열변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시절을 회상한들 너희는 날이 갈 수록 줄어드는 고래의 숫자와, 역병 사망자의 숫자를 세는 것에 급급할 뿐이지. 너희들의 일생은 100도 안되는 숫자에 묶여있기에, 수십만과 수백만, 수천만, 일억을 넘는 숫자를 갈구한다. 필멸의 한계를 가상의 불멸로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행복, 불행, 탄생, 죽음, 기쁨, 뭐 아무렴 어떤가. 한 사람의 삶은 그 불멸에 가까운 숫자를 위해 바치는 피 한방울에 지나지 않지. 나의 제단에 산제물을 바치는 추종자들만 하더라도, 오직 나의 불멸을 갈망할 뿐이지 산제물의 끊어져가는 생명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나는 이미 그런 관습들을 수많이 봐왔다. 지겨울 정도로."

심장은 그를 과거에 묶어뒀고, 청년은 그를 현실로 끌어올린다. 이러다가 잡아뜯어질 것만 같았다.

"더없이 행복했지만, 더없이 불안한 시기이기도 했어요. 당신을 볼 때마다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죠."

"타고난 천재. 자수성가를 가능케 한 번뜩이는 재능. 그렇지만 비천한 출신. 완벽해. 코르보, 너는 검이다. 내 오랜 친구도 '검'이라는 별명이 있지만, 검이라는 호칭은 그보다는 너에게 더 걸맞지. 검은 이가 빠지고 날이 부러질지언정 주군을 지킬 뿐이다. 자신이 이가 빠지고 날이 부러진다고 주군에게 불평하는 일은 결코 없어. 실로 호국경의 지위답지."

"지금에서야 이 질문을 하게 되는군요. 당신은...행복했나요?"

"코르보 아타노, 여제의 수호자여, 다시 한 번 묻자. 호국경의 가면 따위는 벗어던져라. 공허에서 그런 가면은 아무 쓸모도 없어. 지금 여기에는 너와 나, 그리고 여제의 망령만이 있을 뿐이다. 던월 탑에 박제되어 있었던 그 소감은 어떤가? 인간이 아닌 검으로 살았던 그 삶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나?"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