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이야기 - 2화
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왕당파는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당신의 손에 대신 피를 묻히게 했습니다.
그 대가로 축배에는 배신의 독을, 당신의 머리에는 공포어린 총알을 박아넣었고, 당신의 손으로부터는 그녀를 빼앗아갔죠.
이걸 아나요? 그들은 사실 총을 쓰기를 바라지 않았답니다. 그들은 당신을 두려워했기에 저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답니다.
이걸 아나요? 그들은 사실 겁이 많았답니다. 그들이 당신이 죽기를 바랐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문 앞에 그림을 든 그 소녀가 나타나기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칼리스타가 그녀를 데리고 있을 것이라고 덥썩 믿고 있었던 거죠. 모든 일이 자신들의 손 안에서 끝마무리지어지고, 당신은 '아무도' 모르는 새에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자신들은 소녀를 이용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거랍니다. 그리고 소녀를 본 당신이, 독에 중독되어 생명을 잃어가는 당신이, 그 무거운 팔로 몸을 일으켜 소녀에게로 걸어가려 했을 때, 피를 흘리는 그 입으로 '도망쳐'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 정말로 공포에 질렸습니다. 복수를 미끼로 자신들이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 대상이, 사실은 자신들의 손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은 거죠. 그것이 해블락이 방아쇠를 당긴 이유입니다. 황녀 앞에서 지키려 했던 그 두터운 명예와 위신조차도 당신의 의지 앞에서는 벌거숭이와도 다를 바 없었던 겁니다. 묵묵하게 감정을 숨겨왔던 당신의 눈동자에서 절망과 희망, 증오와 배신감을 느낀 순간 그제서야 자신들이 선을 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당신의 시신조차도 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죠. 그렇기에 그들은 그 불쌍한 뱃사공으로 하여금 당신을 바닷속에 매장하도록 시킨 거랍니다. 정말로 하찮고, 정말로 개탄할 만한 이유이지 않나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거에요. 여제의 슬픔을 애도할 여유도 없이, 끝없는 고문으로 당신의 몸과 마음은 끝없이, 정말로 끝없이 짓이겨졌죠. 기억하고 있나요? 콜드브릿지 감옥에서 지져진 화상자국과 채찍의 상처, 잘려나간 손톱 때문에 열에 들떠있었던 그 때를 말이에요. 그때 당신은 과거에 잃어버린 모든 것을 그리워하고 있었죠. 서코노스의 따뜻한 햇볕과 파란 하늘을. 어린 재스민 칼드윈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오랜 원정을 마치고 돌아와, 어린 황녀를 향해 그 손을 뻗던 그 순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 투성이였기에 당신은 더욱더 괴로워했죠. 반대로 그 괴로움이 있었기에 당신은 그 몸을 이끌고, 죽음으로 충만한 감옥을 탈출해 죄인들에게 응징을 할 힘을 얻을 수 있었죠.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당신은 바다 밑바닥에 눕게 되었군요. 바다장어가 곧 올거에요. 그들의 후각은 물 속의 시체라면 무엇이든 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고, 그 이빨은 부대자루를 가볍게 뜯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죠. 이것만은 왕당파의 의도대로군요. 여제의 복수를 하고 황위 계승자를 직접 구출한 당신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오직 불명예하고 증오스러운 여제 암살자, 코르보 아타노만이 역사에 길이 기록되는 것. 이것을 통해 이들은 다음 여제의 수호자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이고, 얼마 가지 않아 그 여제의 손은 그들의 손이 될 것이고, 여제의 눈은 그들의 눈이 될 것이며, 여제의 혀 역시 그들의 혀로 대체되고 말겠죠. 그리고 제국은 그들이 다스리는 여제에 의해서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저 공허 속에서 이 모든 일부시종은 절대적인 방관자가 지켜보고 있겠죠. 모든 파멸은 공허의 일부가 되어, 영원의 순간에 박제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 아이가 울고 있군요. 당신의 손을 찾으면서 울고 있어요.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당신의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도, 총알이 몸을 꿰뚫었던 것도, 마룻바닥을 물들이던 피, 칼리스타의 비명, 당신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던 것, 그 어린 아이는 그 모든 것을 보았지만, 여전히 당신이 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가엾은 것...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간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했듯이, 어머니의 호국경의 죽음 역시 그 아이의 뇌리에는 선명하게 새겨지겠죠.
꿈을 꾸고 있나요? 당신의 손이 움직여요. 생명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는데. 당신도 그 아이처럼, 그 작고 따뜻한 손을 찾고 있는 거군요.
혹시 기억하고 있나요? 당신이라면 그 순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10년 쯤 전인가요? 그것보다 덜할 수도 있고 더할 수도 있겠군요. 그 때 당신은 지금보다 젊었고, 여제 역시 암살자의 검에 찔려 생을 마감하던 마지막 순간보다 젊었답니다.
당신은 그 때에도 이미 호국경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남자였죠. 당신은 여제의 분만실 문 앞에 서서, 몇 시간동안이나 앞만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요도 없이 여제의 부름만을 기다렸죠. 그 때는 한낮이었답니다. 던월은 실로 오랜만에 맑고 푸른 하늘을 뽐내고 있었죠. 던월의 모든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는 동안, 당신은 어두운 분만실 문 앞에 서서 주치의가 문을 열고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렇지만 속마음이 어쨌든 간에, 당신의 얼굴은 항상 무표정하고, 모든 감정은 그 표정 아래에 꾹꾹 감춰져 있었기에 아무도 당신의 마음은 몰랐을 겁니다. 여제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순간에도, 괴팍한 주치의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때에도, 마침내 태어난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던 순간에도 당신은 평소대로 침묵 속에 잠겨 있었죠. 그리고 주치의가 하녀들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 보게."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도, 당신은 정중하면서 딱딱한 목례만을 남겼을 뿐이고요. 당신의 검술과 격투술은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곤 했지만, 신사로서의 격식만은 항상 당신의 특기 범위 외였죠.
그 날은 정말로 날씨가 좋았답니다. 햇빛은 어찌나 눈부시던지, 아이를 막 낳은 여제는 아이의 눈이 상할까봐 분만실의 커튼을 쳐야만 했죠. 그렇기에 분만실은 어두웠고, 촛불만이 그곳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답니다. 기억하고 있을 거에요.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여제는 당신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그런 얼굴을 하고 있군요."라고 말하며 웃었죠. 그리고 당신은 정중하게 예를 갖췄고요. 서코노스 출신의 그 이방인은 결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답니다. 천성이 그랬던 것인지, 자신의 서투른 궁정 말투를 감추기 위해서였는지는 오직 당신과 여제만이 알고 있었겠죠. 여제의 옆에는...작은 아기 침대가 있었죠. 갓 세상에 태어난 여제의 아이는 그 침대에 누워, 촛불의 불빛조차도 버거웠는지 그 조막만한 손을 버둥거리고 있었고요. 그리고 당신은 그 아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죠. 그 때 분만실이 어두었기에, 당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여제는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지만...나는 당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고 있어요.
그 때 나는 당신에게 말했죠. "자, 이리 와서 안아보세요."라고 말이죠. 당신은 평소대로 무감정하게 그 아이에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당신의 손이 흥분과 감동으로 희미하게 떨리던 것을 알고 있었어요. 마침내 아기가 당신의 손 안에 잡혀서 들어올려졌을 때, 당신의 표정이 그때만은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코르보, 커튼을 열어 주시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했죠. 커튼 틈새로 햇살이 쏟아졌고...분만실 구석구석은 빛으로 가득 찼죠. 그때 당신은 그 손으로 아기의 눈이 상하지 않도록 차양을 쳐 줬죠. 아기는 손가락 틈새로 들어온 햇빛이 무던히도 싫었는지, 금새 울음을 터트렸죠. 갓난아기를 본 적은 없었죠? 당신은 그 아기한테 어떻게 해야할 줄 모르고 그냥 손가락 하나를 가져대다가 어르려고 했었죠.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아기는 당신의 손가락을 잡았고, 굳은살이 잡힌 그 투박한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울음을 금새 그쳤답니다. 당신은 그런 아기가 좋았는지, 보드라운 뺨을 그 손으로 천천히 쓸어 주었죠. 간지러웠던 걸까요, 아니면 자길 안은 남자가 자신의 편이란 것을 깨달은 걸까요? 아기는 살짝 웃었죠. 당신의 얼굴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번진 것도 그 때였습니다. 당신은 입을 열다가 멈칫했죠. 그리고 난 그제서야 자신의 호국경에게 차기 황녀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요.
"에밀리. 에밀리 칼드윈이 앞으로 그 아이의 이름이 될 겁니다."
"군도제국의 황제, 재스민 칼드윈의 호국경으로서, 그 아이를 지키십시오. 코르보 아타노, 나의 호국경이여. 나의 삶은 곧 그 아이의 삶이니, 그 어느 것도 경솔히 여기지 말고 그 목숨을 걸고 지키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까?"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의 이름을 불렀죠. 에밀리, XXX란다, 라고 말했던가요?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내 딸은, 에밀리는 아마 태어난 순간 자신을 정답게 쓰다듬고 보호해준 그 손길을 기억하고 있었을 겁니다. 눈이 보이지 않았더라도 그 촉감과 따스함은 선명하게 그 아이의 마음 속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겠죠.
당신은 기억하고 있나요?
당신이 피웅덩이에 쓰러진 순간, 총알이 머리를 꿰뚫고 모든 생명의 숨결이 그 상처를 통해 쏟아져나온 순간. 당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에밀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죠.
칼리스타는 에밀리를 끌어안고, 그 참사를 어떻게든 보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썼고, 눈이 보이지 않았던 에밀리는 벌벌 떨며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손을 뻗어, 피웅덩이를 조용히 더듬으며, 자신을 미처 잡지 못하고 차갑게 식어간 그 손을 천천히 붙잡았답니다. 생의 첫 순간, 강렬한 세상의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준 남자의 따스함을 되찾아보려 애썼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