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스아너드

까마귀 이야기 - 14화

오덕하라 2014. 9. 22. 00:33

주의점 : 이 글은 FPS 게임 '디스아너드'의 2차창작물로, 본편(특히 던월탑 미션 후)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동인설정과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람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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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 판의 게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지. 아주 어렸을 때였던가. 넓은 테이블 위에 보드게임 판을 깔아놓고, 굴린 주사위 숫자대로 말을 옮기는 것, 그런 게 인생이라고 생각했어. 물론 사람이 최대 여섯 걸음밖에 못 걷는 것도 아니고, 삶의 변수도 그 판에 적힌 것보다 훨씬 다양하지. 변수를 전부 판 위에 옮겨 적는다면 아마 백 개의 판도 턱없이 모자랄 거야. 나도 그걸 알고는 있었으니까. 그래도 뭐, 그리 까다로운 게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철들기 전부터 가문에는 돈이 많고, 음식도 풍족하고, 장롱 안에는 계절별로 옷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데다가 고개만 돌리면 시킬 하인이 지척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어른이 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하곤 했어. 물론 어렸을 때 일이야……하하, 그 놈의 예감도 오래가지 못했어. 모건과 커티스의 동생으로 태어난 시점에서 내 운도 이미 다했나 봐.

정말 지독한 인간들이었어. 그 놈들에게는 장난이었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전혀 장난이 아니라고. 덕분에 며칠이나 사경을 헤매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이제 와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열거하자니 끝이 없을 것 같아. 지겨워. 명색이 친동생이지만 난 그들에게 있어서 일개 노리개였을 뿐이야. 그 놈들은 아마 자기들이 한 짓을 기억도 못하고 있겠지. 난 하나하나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더군다나 나는 다른 부분에서조차 그들 다음이었지. 힘이나 날쌘 건 물론이고, 머리조차도 뒤쳐진다는 소리마저 들었으니까. 명문가 자식이니 삼남이더라도 먹고 사는 데에 문제없을 거라고들 그랬지.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빵만으로 살겠어? 아무리 배부른 난쟁이더라도 거인들과 함께 산다면 배부른 게 눈에 들어오나? 당연히 제 키부터 눈에 들어오겠지.

40여년이야. 무려 40여년 동안이나 나는 이렇게 살아왔어. 고양이가 튀어나올 새라 전전긍긍대는 쥐새끼마냥, 항상 형들의 그림자를 두려워해야 했다고. 그걸 이제야 극복할까 하던 참이었는데 말야……자아, 해블락. 이제 만족했나? 유쾌한가? 나한테서 다시 모든 것을 뺏어갔으니 이제 승리의 축배라도 나누고 있으신가 보지? 이제 뭘 어쩔 건지, 한번 그 자랑스러우신 계획 좀 들어보자. 빼어난 전략가이신 티그 마틴 고위주시자께서는 날 위해 어떤 앞날을 마련해 주셨나? 정신차리고 남은 여생은 점잖게 살라고 잔소리라도 하실려나?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여자나 주무르고 술독에서 헤엄치는 얼뜨기 남작으로 살아가라고 할 거냐? 어이쿠, 둘 다 엿이나 먹어라! 그 모습으로 살아가라니, 말이 되는 소리냐? 핏줄만 고귀하신 트레버 펜들턴 남작으로 내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이 기회가 언제 또 돌아오겠어? 이제 내 상대는 저 놈들 둘 뿐이니 승산은 있어. 암, 있고말고. 두고 봐라, 해블락, 마틴. 날 경멸하는 것도 여기까지야. 날이 밝으면 오직 나만이 던월에 입성할 수 있을 테니까!

흥, 명색이 제독이라는 놈이 총 한발 쏘고 빌빌대는 꼴이라니, 아주 기가 찬다니까. 냉혈한이라는 소문도 아주 헛소문 중의 헛소문이었어. 하! 그런 놈들이 나한테서 빚까지 지고, 게다가 무시까지 해? 웃기는 놈들……내가 너희들 꿍꿍이를 모를 줄 아나? 잘난 건 혈통뿐이고, 가진 건 열등감뿐인 머저리로 보고 있겠지? 그래, 열등감이다. 어쩔테냐? 그렇지만 네놈들이 쥐락펴락하려고 안달 난 그 계집은 어떠냐? 그 년 역시 능력도 소질도 없고, 믿을 거라고는 그 잘난 혈통뿐 아니더냐! 낙서나 끼적이면서 동화 속 왕자님이랑 뛰어 노는 데에 정신 팔린 애송이한테 제국을 맡기자니, 너희들도 다를 바 없어! 그리고 대답해봐라, 지금까지의 자금줄이며, 은신처, 협력자들을 무슨 수로 손에 넣었는지 대답해 봐! 그것이야말로 내 힘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아니냐! 오오, 근데 저 자들의 꼬락서니를 봐라. 내가 제국을 위해 투자한 것들을 새까맣게 잊고, 제 위장에 기름칠을 하자마자 날 헌신짝 내던지듯 했구나. 그것도 모자라 증거 인멸을 구실로 삼아 월레스마저 죽이다니……월레스, 불쌍한 월레스. 내 충직한 하인아, 내가 괜히 너를 끌어들여서 그 목숨까지 잃는 꼴을 보고만 있었어. 넌 어릴 때부터 내 편이었고 줄곧 헌신적이었지. 그런데 그 충성의 대가를 이렇게 갚아주다니 정말 미안하다. 그들의 허언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어! 해블락, 이 멍청아! 은혜를 배신으로 갚고, 예의를 무례로 갚은 네 앞길이 훤할 것 같으냐? 천만의 말씀이다. 앞으로 네가 향할 길목에는 저주와 불운만 가득할 테니까! 내가 구해온 독이 있어서 넌 목적을 다할 수 있었고, 그 늙은이가 있어서 술잔에 독을 따를 수 있었지. 이 겁쟁아, 제 손을 더럽히기 그렇게 무서워서 제국의 희망이 되려고 자처하는 거냐? 제국도 참 말세야. 흥,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먹는다고 하더니, 딱 지금이 그 꼴이군.

……아니, 잠깐만. 내가 도대체 왜 그 짓을 한 거지? 왜 형들에게 들킬 위험을 무릅쓰면서 독을 훔쳐온 거야? 왜 새뮤얼에게 독을 타라고 지시했더라? ……아, 맞다. 호국경이야. 그 자에게 먹이려고 그랬어. 이름이 어떻게 되더라? 맞아, 코르보였지. 성이 뭐였더라……늘상 이름만 불렀더니 성이 도통 기억나지 않는군. 아무렴 어때, 이젠 지난 일인데. 죽은 사람 이름을 떠올려봐야 어디에 쓰겠어? 왜 이렇게 정신이 흐릿한 걸까. 영문을 모르겠어. 티비아산 보드카였나……그걸 마시면 좀 정신이 들 텐데. 아, 그래. 그 자와 하운즈 핏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술을 마시고 있었지? 술맛 덕분에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웃기군. 그 남자는 솔직히 지금까지도 뭐하자는 놈이었는지 알 수 없어. 암살사건이 벌어지고, 재판정에서 지나쳤을 때부터 영 사람몰골이 아니었으니까. 자기가 참수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도 못 알아듣던 눈치였지. 게다가 해블락이 술집에 데려왔을 즈음에는 아예 사람보다는 시체 쪽에 가까웠잖아? 난 처음에는 제독이 사람을 잘못 데려온 줄 알았지. 아니면 술을 너무 마셔대서 정신이 좀 이상해졌거나. 저런 지저분한 몰골에 꺼림칙한 분위기를 한 자에게 도대체 누가 맨정신으로 제국의 앞날을 맡기겠어? 저런 송장에게 우리가 힘을 보태야 할 정도로 제국이 말세인가 싶었지. 하, 그래도 캠밸을 처치하고 공주를 구해왔을 때는 제법이다 싶었어. 마틴을 구해온 건 지금와선 실수 같지만 말야. 하긴 부모나 가문도 제대로 되먹지 못한 촌뜨기가 실력이 아니고서야 여기까지 올라왔을 리 없지. 어휴, 목말라. 어디 마실 것 좀 없나? 분명히 이 근처에 한 병은 있을 텐데……맞아, 친애하는 내 형님들도 그 자 덕분에 앞으로 지금까지의 대가를 치르면서 살게 되겠지. 아마도 평생.

자아, 진정해, 트레버. 이젠 정말로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지난 40여년의 고난이 드디어 결실을 맺고 있다고. 네 외모를 비웃은 자식들이나, 무지함이나 성벽을 비웃은 자식들도 더 이상 널 업신여길 수 없어. 아니, 그게 문젠가? 모두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감투 하나만 씌워주십사, 용서해주십사 온갖 추태를 떨겠지. 오냐, 어디 한번 실컷 해봐라. 내 신발을 핥고 수천 번 꾸벅꾸벅 절을 해댄들 내가 또 속을 줄 아냐? 어차피 네놈들은 양의 탈을 쓴 독사들에 불과해! 이놈이고 저놈이고, 여제가 저들 위에 군림할 때는 여제에게 꾸벅거리더니 이젠 대섭정이 그 자리를 꿰차니 그 찬란한 머리를 향해 꾸벅꾸벅거렸지. 하하하! 결국 네놈들은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자라면 시궁쥐든 핏덩이든 간에 머리를 조아릴 것 아니냐? 내가 모를 줄 알았나보지? 네놈들 배때지에 기름을 채워줄 군주님이라면 아무나 상관없잖아. 그래놓고 친애하는 군주님께서 바닥에 쓰러지고 약간이라도 흠이 보일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털겠지.

해블락, 마틴! 바로 네놈들을 두고 하는 말이야! 어디 한번 오늘 밤이 지나고 보자고. 나한테 눈물을 흘리면서 목숨구걸을 하더라도 내 눈썹 하나 끄떡이나 봐라. 벌거벗겨서 던월 거리를 행진시킨 다음 수해지구에 쳐넣어주마. 아니면 이건 어떨까? 모두 앞에서 죄상을 까발린 다음에, 렌헤이븐 강에 수장시키는 것 말야! 마치 그, 그, 그……”

“그 남자처럼 말인가?”

“……!! 누구야!!”

“……”

“나와! 당장 나와! 숨어있지 말고!”

“……”

“뭐야? 환각인가? 헛소리라도 들은 거야? 아, 그래, 그렇겠지……그렇고말고. 요즘 통 무리를 했으니까. 음식도 맛없고, 잠자리도 불편했으니 당연해.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야? 계획대로였다면 던월 탑에서 발 뻗고 잠이나 자고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된거야? 코르보, 혹시 물 밑에서 저주라도 걸고 있는 거냐? 허, 그럼 잘 됐군, 잘 됐어! 네 망령 덕분에 우리 모두 여기서 난리법석을 피우면서, 대관식이고 자시고 전부 새까맣게 잊어버렸지. 이제 만족하냐!? 네가 사랑해 마지않던 여제의 복수도 끝냈으니 이젠 편히 눈이나 감아라! 날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려거든 암살을 결심한 해블락과 그 계획을 짠 마틴 두 사람을 원망하라고! 난 그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어. 널 죽여야 한다고는 생각한 적 없다고. 이 사태의 공을 고스란히 빼앗길 까봐 전전긍긍했던 그 돼지들 때문이지.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멋대로 진행시키고, 나중에 ‘예’나 ‘아니오’로만 대답하라는 식으로 나한테 선택을 강요하던데. 흥, 그게 선택이던가? 반 협박이지. 애, 애초에 아크파일런이니, 감시탑이니 별별 요술 같은 발명품이 넘쳐나는 시대에 칼로 황제를 지킨다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야? 헛소리야. 시대에 뒤떨어진 명분주의는 이미 신화나 전설과 함께 죽어가고 있는 시대라고. 황실이 전통이라는 고상한 단어로 지키던 지저분한 알맹이 따위는 이제 필요 없으니까. 코르보, 너 역시 그 일부였겠지. 네가 한 일이 도대체 뭐야? 결정적인 순간에는 무능하기만 한 호국경이 도대체 무슨 필요란 말이지? 여자의 보모놀음이나 하려고 그런 전통이 유지될 필요는 없어!”

“그 남자와의 만남은 그렇게 짧았건만, 그에 대한 관심에 자기정당화는 넘쳐나는군. 그 자가 그렇게나 인상적이었던가, 트레버?”

“아……”

“흥미롭지 않나? 한 인간의 삶은 얼핏 보기에는 그 개인의 업적과 능력, 자아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처럼 보이지.”

“누구야! 누구냐고! 어디야!?”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어떨까? 무수한 개인 중에서 특히 돌출되는 개인들을 묘사하는 너희들의 말을 보아라. ‘위인’, ‘천재’, ‘기인’, ‘광인’, 그런 개인을 묘사하는 세간의 용어들은 인간이 세상의 구조에서 독립할 수 없으며, 오히려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야. 남들보다 위대하고, 남들보다 총명하고, 남들보다 괴짜라는 말은 결국 비교의 대상이 있고, 개인에 대한 사회라는 대비가 있기 때문에 존재 가능한 것이지. 이 세상에 오직 천재 하나만이 있을 때, 그 천재가 과연 천재라고 대우받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범재니 천치, 평범함이라는 말들도 인간이 집단의 일부일 뿐 아니라 외부자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빌어먹을! 렌 대위! 거기 누구 없는가!! 어서!!”

“당황한 모양이군. 이 친구야, 내가 자네에게 해를 입히려고 왔다면 이렇게 한가하게 이야기나 하고 있겠나? 걱정 말게나. 너나 그 남자나, 항상 누군가에 대한 비교격으로만 살아온 자들이지. 물론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정반대이긴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동병상련이야.”

“닥쳐! 누군지 모르겠지만 썩 나와!”

“세간의 단어로 평가하자면, 그 남자는 ‘뛰어난’ 축이며, 자네는 ‘뛰어나지 않은’ 축에 속하겠지.”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어 줄 테니 썩 나오지 못해!”

“돼지들의 탐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나? 벌써 몇 천 년 전에도 있었던 주제였는데, 여전히 그 주제는 약간의 변주만 가미하면서 반복되고 있군. 조금 더 신선한 주제를 만들어내면 좋을 텐데 말야. 그렇지만 트레버 펜들턴, 네 의식의 밑바닥에서 너를 옭아매는 것 역시 예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숱하게 반복해온 것들에 지나지 않아. 너와 다른 이들을 가르고 구분하는 크고 작은 차이야말로 너를 지금의 이 자리로 이끌어온 열등감과 분노의 근원이겠지.”

“뭐, 뭐뭐뭐라고, 네가, 감히 그런 소리를, 어디서 굴러먹은 지도 모르는 놈이, 감히,”

“항상 밝은 곳을 원했지. 자애로운 여제의 손길조차도 펜들턴 가문의 막내를 쓰다듬는 것을 주저했어. 만인에게 공평할지어다……남작으로서의 자질에 대한 의심, 난잡한 소문에 대한 불편한 감정으로 이 말은 항상 지켜지지 못했지. 아무리 위대한 군주이자 제국의 정점이라고 추켜세워진들 그녀 또한 한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너 또한 그런 눈길에 분노를 느꼈을 게다. 그녀만은 다르기를 바랐으니까.”

“집어치워! 너, 너, 지금, 내가 여제를 증오했다고 중상모략하는 거냐? 그 따위 억측으로 내 충성심을 깎아내리려고 해? 웃기는 소리! 난 폐하의 권위에 일말의 의심을 품은 적도 없었고, 권력욕에 찌든 하이람보다 황녀님을 더 믿고 따라! ‘충성파’, 이 ‘충성파’라는 이름을 그저 남에게 자랑하려고 입은 줄 아나 보지? 하이람 그 대머리가 모두를 서슬 퍼렇게 감시하고 있는데? 내 목숨이 걸렸는데 그저 모험극 주인공처럼 뽐내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위험에 스스로 뛰어들 수가 있겠어? 아냐, 아니라고! 어디서 굴러먹은 놈팽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헐뜯어봐야 소용없어. 네놈 자식이 백 년을 지껄이든 내 충성심이 어디 끄떡이나 하나 보자!”

“트레버, 트레버. 어디 사람이 한 가지 면만 갖고 있겠는가? 동경 뒤에는 시샘과 자기혐오가 있을 수 있고, 영예 뒤에는 상실에 대한 불안과 초조가 공존하는 법이야. 옥좌 위 황제에서 쓰레기통 속 사산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종속되는 이 섭리에, 어디 너와 황제만 예외겠는가. 그건 ‘나쁘다’나 ‘좋다’라는 말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아. 자연스러운 것에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 그건 그렇고, 태어나서 줄곧 아픔을 벗삼아 살아온 이들은 그만큼 훗날의 예정된 아픔에도 민감하다는 것을 아나? 쌍둥이의 악의없는 장난 탓에 생과 사의 경계를 수시로 오간 네가, 어찌 황제의 눈길 속 감정을 알지 못했겠나?”

“아니야.”

“너보다 우월한 자들이 약자를 향해 갖는 악의들, 형들의 장난과 부모의 실망, 하인들의 수근거림, 여제의 불신, 제독과 주시자의 경멸감, 이러한 자들의 생각과 감정을 포착해서 네게 알려준 것은 다름아닌 너 자신의 감각이지.”

“아니라니까!”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양해야 할 것들 투성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것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헤어날 수조차 없는 것들이지. 재미있는 비극이야.”

“아니야, 아니라고! 네깟 놈이 뭘 안단 말야! 안전한 구석탱이에 숨어서 비겁하게 헐뜯기나 해대는 네놈이 뭘 알아! 내 노력이랑 희망을 얼마나 봐 왔지!? 그, 그, 자식들, 나보다 나은 것도 딱히 없는 놈들이, 아무리 나, 날 깎아내려도 내 얼마나 꿋꿋하게 버텨왔는데. 하, 하하하, 하하하하……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옛말 틀린 것 하나 없어……골든캣에서 오입질한 게 어디 나 뿐이겠나? 그런데도 지들은 주시자 뺨치는 성자인 척, 깔끔한 짓이라고는 전부 떨어대지. 난 적어도 그 놈들과 달라! 겉은 지저분하다고 욕을 먹더라도 소신껏 살았어, 누구보다도 소신있게!”

“트레버, 너는 다른가? 너의 형제와 적들보다?”

“암, 달라, 다르고말고! 엄연히 다르지! 신념 따윈 종이처럼 얄팍하고, 레이스처럼 겉만 번드르르한 시대라고! 입만 산 간신배들이 살기에는 절호의 세기지! 소설 속 정의의 사도라던가, 동화 속 현자따윈 이미 과거의 유물일 뿐이라고! 정의로움만으로 세상을 살려면 목숨이 9개여도 모자라지만, 그래도 난 선택했어! 하이람 버로우스가 흘린 찌꺼기를 주워먹으면서 배불리 사느니, 굶주리면서 재스민 칼드윈의 옥좌를 세우기로 선택했다고! 형제의 탈을 뒤집어쓴 적을 두 사람이나 내 곁에 두고, 모든 용기를 쥐어짜내면서 정의로운 계승을 할 수 있도록 애썼단 말이다! 그, 그런데도, 같은 처지에 있었던 놈들은……날 돕던 그 놈들은, 결국 다른 쥐새끼들과 다를 바 없이……”

“그래, 확실히 그 부분은 다르군. 귀족의 자식으로서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좁은 길을 택했고, 언제 열릴지도 모르는 정의의 좁은 문 앞에 서서 인간의 정신과 육신의 한계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으니 말이야.”

“더러운 배신자 자식들! 내가 얼마나 너희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이 비겁한 놈들!”

“슬픈가, 트레버? 그 자들이 원망스럽던가? 배신감에 치가 떨리나? 소외받아온 자로서 늘 권력의 가장자리를 서성대고, 실패자로서 언젠가 다가올 성공과 보상을 기대하던 기억들이 좌절되니 원통한가? 순수한 투사를 가장하면서 연기해왔던 비련의 주인공 행세가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갔으니 이제 만족스럽지 못하겠군.”

“뭐?”

“들은 그대로다, 트레버.”

“뭐라고? 비련의 주인공? 행세? 어, 어어어디서 감히 그런 소리를, 감히 나한테, 겁도 없이……”

“참 비극적이지. 눈높이, 지위, 재산, 생김새, 성격……사소하기 그지없는 차이는 사소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인간을 이끌고 말아. 그리고 종국에는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말지 않던가. 그것으로 끝나면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 피에 눈이 먼 나머지 자신의 본래 위치조차도 망각하고 말지. 그리고 이제 자신과 상대방의 위치를 전도시키기까지 하니.”

“나와! 당장 나오지 못해! 이 무례한 자식!”

“아, 점점 가까워지고 있군.”

“더 이상 못 참아! 어디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놈, 죽여버리겠어!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장난질도 놀림도 뒷담화도 전부 지겹다고! 하나같이 날 농락하고 이용해먹는 놈들 투성이더니, 이젠 네놈마저도 마찬가지로군! 어서 나와, 빌어먹을!”

“이 친구야, 나를 봐서 무엇이 달라지겠나?”

“겁쟁이!”

“인과의 굴레 밖에 서서, 방조를 하는 나한테 총알을 쏴 봐야 나아질 것이 뭐가 있겠나?”

“변명은 집어치워! 썩 나타나지 못해? 그, 그래, 알았다! 네놈도 이교도구나! 제국의 안녕을 훼손하는 그 더러운 무리 중 하나지? 흑마법으로 이 땅을 유린하고 교단을 부패시키려고 획책하려는 거지? 그 마법으로 모습마저 감추고 있어 보이는 척 하는 말을 지껄이면서!”

“트레버여. 정말 식상하고 질리지도 않는 이론을 펼치는구나. 벌써 수백 번이고 되풀이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너한테는 어찌 됐든 처음이니 한번 더 이야기하지. 지금 너를 진정 위협하는 것이 철천지원수인 흑마법 때문인 것 같은가? 그렇지만 보이지도 않는 이단의 손이 어찌 네 목을 조를 수 있겠나? 마법에 ‘사악함’이라는 의미가 더해지는 것은 거기에 인간의 사악함이 있고, 사악한 소원이 있기 때문이 아니더냐? 살인이 벌어졌을 때 살인자의 검이 아니라 살인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너희들의 도리인 것을 참 쉽게 잊는구나. 그 뿐이던가? 너를 위험에 몰아넣고, 그간의 명예를 단번에 추락시킨 것이 비단 상대방의 중상모략과 음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너 또한 알텐데.”

“그럼 내가, 이런 꼴이 된 게 내 탓이라고? 모든 걸 내가 자초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그 대답을 너는 이미 알고 있겠지. 너를 포함한 셋이 데려오고, 두려워하다가, 떠나보낸 그 자 또한 알겠지.”

“코르보? 코르보 말이냐?! 자, 잠깐! 넌 누구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기다려, 어떻게 코르보를 아냐고! 정체를 밝혀!”

“내 정체?”

그 귀에 들린 것은 웃음소리이거나 한숨처럼 들렸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는 바로 그의 뒤, 귓가에서 들려왔다. 태고 적부터 존재해왔을 검은 심연 두 개가 그를 노려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 또한 곧 알게 될 거다, 트레버 펜들턴.”

그 짤막한 한 마디에, 등줄기에 차가운 얼음 한 방울이 흐르는 듯한 오싹함이 일었다. 그 선명한 감각에 펜들턴은 전율했고, 정신을 차렸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듯 팔을 휘젓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지나가던 메아리가 그에게 말을 던지고 다시 사라진 것 같다. 희번덕거리는 눈을 무언가가 찔러서 비명을 질렀지만 알고보니 그것은 자신의 땀이었다.

“빌어먹을!”

환각이다. 진정 사람의 목소리였다면, 밤기운을 가득 머금어서 먹먹한 공기를 이토록 하찮게 뚫어버릴 리 없다. 환각이어야만 한다. 술을 갈망하다 못해 반쯤 미쳐버린 그의 정신이 지어낸 허상일 것이다. 술이 필요하다. 아니면 절망적인 상황에 몰리다 못해 피어난 자학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저리도 저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 마음을 푹푹 찔러대는가. 펜들턴은 건물의 갈라진 틈새에 머리를 들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없었다. 옷이며 무기며, 온갖 것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작은 산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거기에도 없었다.

“아니야!”

곧 알게 된다고 그 그림자는 말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알게 된단 말이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펜들턴은 알 생각 따윈 추호만큼도 없었다. 주정뱅이처럼 한참을 비척거리고 나서야 그는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자초한 적 없어! 난 자초한 적 없다고! 내 잘못이 아니란 말야!!”

펜들턴은 벽에 위태롭게 기대서서, 바깥을 향해 난 틈을 엿보았다. 이제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마를 흐르는 비지땀을 훔치고 훔쳤지만, 땀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비가 그토록 세게 쏟아지더니, 이 세상의 소리마저 씻어내 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방은 조용했다. 누군가의 신음소리나 속삭임마저도 들리지 않고, 이제 들리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소리뿐이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토록 많았던 부하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목이 말랐다. 쓸데없이 혼잣말을 많이 한 탓이었다. 술이 필요했다. 그래, 그 동안 술을 덜 마셔서 이렇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들어주는 상대 없이 횡설수설 한 것도, 기이한 환청이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도, 땀이 과도하게 흘러나오는 것도 이 빌어먹을 술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펜들턴은 벌벌 떠는 손으로 잡동사니 안을 헤집었다.

“자초한 적 없어……자초한 적 따윈 없다고……”

이 또한 중상모략일 뿐일 것이다. 여태껏 그래 왔듯이, 그를 헐뜯으려고 기를 쓰는 파렴치한 말 따윈 들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 바닥에 침이라도 뱉듯이 아무 감상이나 내뱉고, 정작 그 부당함을 지적당하면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대꾸하면 그만일 뿐이다. 그 대화에서 승자는 언제나 모욕한 이였고, 패자는 언제나 모욕당한 이였다. 혀로 남의 상처를 들쑤시며 희열을 느끼는 저 족속들은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들의 무리와 다름없었다. 이 물건 더미 속에 내용물이 들어찬 술병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멈출 수 없었다. 그에게는 진통제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거짓말쟁이, 위선자……이 놈이고 저 놈이고 다 똑 같은 놈들 뿐이야……내 처지를 동정하던 놈들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반드르르한 놈들에게로 얼굴을 돌려버렸지, 하하하, 그러면서 뭐?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다 똑 같은 놈들이야……전부 다! 다! 아, 아니 이게 뭐지, 이건……”

녹색 술병이 물건더미의 바로 뒤에 놓여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여기에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태연자약한 자태다. 펜들턴의 떨리는 손이 병을 들어올렸고, 그 묵직한 중량을 확인했다. 촌촌히 흔들자, 찰랑이는 액체의 맥박이 그의 손바닥으로 전해져 왔다. 잠시 그 진동을 느끼던 남작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병따개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손톱으로 코르크 마개를 긁어댔다. 부스러기 조금이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잡동사니를 사방으로 집어 던지면서 헤치자, 송곳 하나가 나왔다. 그에게 송곳에 번진 벌건 녹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날카로운 끝, 자신의 손톱보다 훨씬 예리하고 견고한 그 날붙이뿐이었던 것이다.

“젠장, 젠장, 젠장……”

코르크의 절반이 병 속으로 빠졌지만 그게 무슨 대순가. 한참을 씨근거리며 손을 놀리자, 마침내 조그마한 구멍이 마개 가운데에 뚫렸다. 그는 성급하게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게걸스럽게 들이켰다. 발효된 포도가 풍기는 시큼털털하고도 알싸한 알코올의 향이 그의 콧속을 가득 채웠고, 이윽고 혀를 마비시켰다. 이 상황에서 예상하기 힘들었던 술의 향기가 그의 사고를 잠시 마비시켰다. 정신없이 코를 벌름거리며, 펜들턴은 한참이나 이 행복한 마취제에 도취되어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환희의 순간을 음미한 뒤에야 그는 습기로 가득한 밤공기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어디선가 찍찍거리는 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정신을 차리고도 한참이 지나서,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허허허…….허허허허허…….아, 아하하하하……”

첫 마디는 헛웃음이었다.

“세, 세상에, 이게 왜, 이제서야……”

술병을 갓난아기 다루듯 어루만지는 눈가는 벌겋게 익어 있어서, 누가 본다면 영락없이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 동안 입에도 대지 못했던 그 포도의 향기가 그를 열렬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병을 기울여 익숙한 맛을 확인했고, 그간의 분노와 공포, 초조함이 허탈할 정도로 급격히 가라앉아갔다. 짜릿한 술맛이 그 오감을 충만하게 채웠고, 격정은 황홀감에 저만치 쓸려나갔다. 혀로 맛을 확인도 하기 전에 목구멍 너머로 술을 들여보내는 꼴은 교양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 펜들턴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술병을 절반 가까이 비우고서야 그는 간신히 그 병적인 발작을 잠시 멈추었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털이 허연 쥐였다.

“뭘 보는 거냐?”

쥐는 킁킁대면서 남작을 쳐다볼 뿐, 도망가지도 달려들지도 않았다.

“보기 재밌더냐? 하, 아무렴 재미있겠지! 천하의 펜들턴 가문의 남자가, 술에 곤드레만드레 한 꼴이니까 재밌고말고! 하, 이제 보니 사람처럼 구는구나 요 쥐새끼야! 던월의 인간들을 잔뜩 먹어치우더니 이젠 사람의 말귀 정도는 알아듣게 됐나 보지? 아, 맛 좋다.”

남작을 지배하던 공포는 어디론가 가 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 그는 충혈된 눈을 홉뜨는가 하더니, 다시 쥐를 노려보았다.

“조금만 더 지나면 이젠 아주 옷도 입고 두 발로도 걷겠구만! 그리고 뭐, 손수건을 넥타이 삼아서 귀족 행세라도 낼 참이냐? 나 같은 반푼이도 귀족행세를 하는 세상인데 쉽겠구만 거 참! 아니다, 혈통이 변변찮으니 그건 무린가?”

이제 그는 웃었다. 한참을 어린이처럼 깔깔 웃으며 포복절도를 하더니, 느닷없이 웃음을 싹 거둬들였다. 그리고 정신 나간 듯 얼굴을 세수하듯 비벼댔다.

“대체 어디가 모자랐어!”

쥐는 꼬리를 움찔했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왜 그랬냔 말야, 왜! 왜 기다려 주지 않았냐고!”

거의 절규에 가까운 펜들턴의 고함과 함께 병이 와장창 깨졌다. 빨간 포도주가 피처럼 번졌다.

“나, 난 느렸단 말야. 굼뜨고, 머리도 덜떨어지고. 형들에 비하면 허구한 날 한 발자국은 뒤쳐지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그런데 그게 뭐! 그게 어때서! 난 느렸을 뿐이라고! 느릴 뿐이지 항상 계속 달리고 있었지, 멈추려고 한 적은 단연코 없었어! 주시자 놈들이 허구한 날 지껄이는 ‘욕망을 멀리하고 덕을 쌓아라’느니, ‘결과에 눈이 멀지 말고 과정을 중시하라’느니, ‘먼 미래를 위해 계속 전진하라’느니, 그 고색창연한 설교대로 살았단 말이다, 어릴 때는 말야! 게임처럼 보상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고. 네놈들이 깔보는 그 음탕하고 탐욕적인 데다가 질투심으로 똘똘 뭉친 트레버 펜들턴이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는 걸 왜 몰라?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남을 시기하고 있었을 것 같아? 옹알대던 시절부터 남이 쥔 걸 빼앗으려고 패악부리는 인간이었을 것 같아?! 개소리야!”

횡설수설하면서 다시 얼굴을 비볐다. 정신없이 오르내리는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펜들턴은 밀어 올라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서 숨을 한참 골랐다.

“트레버 펜들턴을 만든 건 네놈들이겠지! 네놈들의 눈빛이라거나 그 말 한 마디! 손가락질! 장난! 그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그래놓고서 ‘장난인데 왜 그냥 넘어가지를 못하’냐고 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지. 날 질릴 때까지 밟아 뭉게 놓고서 이제 그 책임은 내가 알아서 지고 가라는 거냐, 어?!”

눈물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눈앞이 뿌옇게 되었다.

“그런 놈들이……자기들이 한 짓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칠계명대로 살라고 잘난 척에 훈수나 하는 새끼들……네놈들이라고 나보다 잘난 줄 아나? 똑 같은 놈들이지……그래놓고서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긍정적으로 살라는 소리나 해? 거울이나 보고 말해! 나, 나는……나는……”

펜들턴은 문득 말을 멈췄다.
술기운에 무르익은 시야는 온통 뿌옇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쥐가 있던 자리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기둥처럼, 요새의 일부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불온한 실루엣이었다. 펜들턴은 그 그림자에게서 익숙함을 느끼고 입을 쩍 벌렸다. 쉴 새 없이 놀리던 입은 의미 있는 말이라고는 어느 것 하나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머리는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눈꺼풀이며 입, 코, 손, 발이 움직임을 되찾기 시작했다. 낯익은 침착함과 고독함을 껴입은 듯한 저 그림자, 그렇지만 저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고, 다시 떠들썩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펜들턴의 웃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모습이 자못 우스꽝스러웠다.

“그래애, 그래!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정말 옛 말 틀린 건 하나도 없구만! 네 얘기가 나올 것 같으니 참을 수 없더냐, 코르보? 아주 관짝을 박차고 나타나셨구만!"

그림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렴,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이다.

“너도 똑같아!”

이상하게도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어졌다. 저 오만한 그림자에게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올랐다.

“너도 똑같다니까!”

이제 그는 울지 않았다. 계속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 망령을 향해 삿대질했다. 머리도, 혀도,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통쾌했다. 술은 이래서 좋은 것이다.

“너라고 달랐겠냐, 너라고 말야! 그래, 내가 어떻게 여제를 향해 공경심만 품고 있었겠어!? 그 여자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감사해했지, 위엄도 있으면서 공손함까지 갖춘 여자였으니까! 제국을 위해 힘써준 것에 감사하나이다, 하고 언제나 입에 발린 말을 하는데 솜씨 참 걸작이더라! 누구 자식 아니랄까봐 말야. 그런다고 내가 못 볼 줄 알았나 봐. 아니야, 난 봤어. 봤다고! 예의를 표하려고 뻗은 내 손이 그 년의 손에 닿았을 때, 그 년이 어쨌는지 알아? 꿈틀거리면서 살짝 뒤로 뺐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고. 제발 당신만은 남들 같은 표정을 하지 말아달라고! 모두를 포용하는 자애로운 여제라잖아? 미천한 거렁뱅이도 내버리지 않고, 역병 걸린 환자를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구제의 대상으로 삼은 재스민 칼드윈이었잖아? 너는 못 봤을 거야. 여제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사냥개라면 그 년이 지은 불쾌한 표정은 아예 알지도 못할 걸! 그런데 말야, 난 그 표정을 아주 잘 알고 있지. 40년도 넘게 살면서 본 얼굴들은 하나같이 나라는 존재에게 불쾌감을 가득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하하, 그 여자도 결국에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그 때 인정하면 좋았을 것을, 무슨 영화를 누리자고 공경하고, 흠숭하고, 영광스러워하고, 경외하고 그 난리를 피웠던 걸까! 어차피 그 여자가 보기에 난 여자 끼고 놀아나는 놈팽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텐데! 뭐야, 불쾌하냐 코르보! 네가 사랑하던 황제마마가 모욕당하니 기분이 더럽지? 주변에서 쑥덕대는 소리를 들어댔으니 너도 내 사생활을 많이 알고 있을 테고, 그런 추접한 놈이 혀를 놀리는 게 얼마나 꼴같잖겠어? 근데 이건 아냐? 네가 나에 대해 그렇듯, 나도 그 여자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 어디 나 뿐이겠어? 알 만한 놈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먼 친척뻘 되는 귀족이 창부와 놀아난다고 경멸하는 주제에, 정작 자신은 천민에게 자기 밤시중 들게 시키지 않나, 응?”

그림자와 자신의 거리가 약간 좁혀진 듯 했다.

“네가 여제랑 대충 그런 관계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이 송장 녀석아!”

펜들턴은 숨이 찬 나머지 한동안 씩씩거렸다. 벽 한쪽이 허물어진 이상한 방 안을 지배하는 것은 침묵이었고, 그 방에는 오로지 펜들턴과 저 그림자 둘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펜들턴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보다 강한 자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겁쟁이!”

야유하려는 듯 새된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그리고는 제 풀에 중심을 잃어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겁쟁이 같은 년!”

그림자는 조금 더 커졌다.

“나를 비난하고 싶었지? 여제만 아니었으면 뒷구석에서 다른 계집들과 쑥덕거리면서 남 흉이나 봤겠지! 아이고, 오죽 답답했을까! 그렇지만 지 처신이나 한 다음에 그러지 그랬나! 겁쟁이 펜들턴이니, 용기를 황금 고양이 집에 맡기고 다니는 펜들턴이라느니, 그렇게 부르고 싶었겠지? 뭐 자기 최측근한테는 실컷 그렇게 불렀겠지만 말야! 근데 있잖아, 그 입에 용기를 운운하고 싶었다면 자기야말로 먼저 모범을 보였어야 하지 않겠어? 황제답게 그 사생아의 친부를 밝히고, 자기랑 호국경의 관계를 알릴 것이지 뻔뻔스,”

그림자는 펜들턴의 입술을 틀어쥐었다. 바위처럼 차가운 손에 술이 번쩍 깨는 것 같았다. 입술이 찰흙처럼 뭉그러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것만 같아, 그는 한참을 욱욱대며 그 손을 떼내려 애를 썼다. 그러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펜들턴은 그간 억눌린 모욕감과 욕설을 한바탕 더 쏟아내고 싶다는 미련을 가득 담아, 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용기도 부질없이, 빛을 등진 그림자에게서 풍겨나오는 살벌한 기운에 혀가 절로 오그라들었다. 남작이 조용해지자 그림자는 입술에서 손을 뗐다.

“……너, 누구야.”

펜들턴은 위풍당당하게 서 있으려 노력했다. 저 그림자가 유령이 아니라 실체를 지닌 무언가라는 가능성을 부정하려고 애쓰면서. 그러나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저 손은 분명 실재하는 것이었다. 그림자는 바닥의 병 파편을 주워들었다. 저 자는 누구인가? 코르보? 아니, 코르보는 죽었다. 날 죽이지 않았으니 아군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내 부하라면 들어가기 전에 미리 언질을 줬을 것이고, 애당초 저 옷을 입고 있을 리 없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살아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봤다. 분명히 죽었다. 마룻바닥에 피를 질질 흘리면서, 개처럼 엎어져서 죽었다. 마틴이 발로 시체를 굴려봤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 공간을 지배하는 침묵이 무서웠다.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예감이 사실이 될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겁쟁이가 되는 것 역시 싫었다.

“너, 넌, 코르보 맞냐? 인간인 거야? 어떻게 했길래 아직도 살아있는, 아, 아니아니, 내가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왜 닥치고 있는 거야. 무슨 말이나 좀 해봐! 날 그만 조롱하란 말야!! 말해, 넌 누구야!!”

병을 살펴보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펜들턴을 직시했다. 저 눈, 익숙한 가면 틈새로 보이는 저 낯선 눈동자는 누구의 것인가. 지금까지 아무도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본 적 없었는데……불현듯 그 눈이 이지러졌다. 초승달 같은 곡선을 그리는 저 눈은 웃고 있는 걸까.

“펜들턴 경.”

펜들턴의 눈이 커졌다. 저 익숙한 목소리, 억누른 듯 잠긴 저 목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그를 지탱하던 무모한 용기는 밤안개에 녹아버려 온데간데 없어진다.

“펜들턴 경, 당신이 굳이 그 슬픈 얘기를 늘어놓지 않았어도, 난 당신을 믿고 따랐소.”

그제서야 남작은 입을 벌렸다. 입에서 나온 것은 대답이 아니었지만.

“죽었는데, 죽었는데, 그 때 죽었는데……”

“그런데 당신은 그러지 않았지.”

한 발자국 남자가 가까워졌다. 추측은 의혹을 넘어 확신으로 굳혀졌고, 며칠 간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어놓았던 기분 나쁜 망령이 바로 그의 앞에 다가왔다. 지난 날의 악몽은 이 날을 예견하기 위해서였던가. 펜들턴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뒤로 곧바로 물러났다. 바로 뒤에는 무너진 벽이 있고, 그 구멍 너머에는 땅에서 몇 미터 떨어진 허공만이 있다. 떨어지면 몸은 분명 성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앞은 어떤가. 자신한테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는 악마가 있지 않은가. 해블락과 마틴이 공모하고, 자신과 뱃사공이 시행한 짓을 똑똑히 알고 있는 악마라면, 무엇을 상상하든 죽음보다 더 한 짓을 분풀이 삼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밑바닥에 떨어져서 불구가 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아니, 그건 너무 아프다. 펜들턴의 머리 속은 정신 없이 두 가지 선택지 사이를 헤맸다. 고문과 반병신, 두 생각에 압도된 그의 정신은 사병을 부른다는 생각조차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반면 코르보는 태평했다. 사방을 오가는 펜들턴의 시선을 조용히 구경할 따름이다. 파란 눈이 조용히 병 라벨을 훑고, 입은 그 단어를 또박또박 읊었다.

“서코노스, 카르나카 산. 19년 전 제조.”

펜들턴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영 혼란스러웠다.

“맛있었소?”

이 자는 어떤 대답을 원한단 말인가.

“나한테 준 술도 이것이었던 걸 보니, 여간 좋아하는 게 아닌 것 같군.”

나한테 준 술?

“그래서……맛있었소?”

나한테 준 술? 언제?
이제 그의 머리는 사고를 거부하고 있었다. 반면 그의 손은 천천히 목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고, 손가락은 애처롭게 꿈틀대며 그 목을 긁기 시작했다. 나한테 준 술. 자신이 준비한 카르나카 산 19년된 술 한 병. 어린이도 좋아할 정도로 맛이 탁월한 술이었다. 그 술 안에 독약이 섞여 있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우웩. 목구멍을 뒤흔드는 메스꺼움에 펜들턴은 토했다. 시큼한 신물의 기운이 콧구멍 한 가득 차오르는 듯 했다. 그래, 왜 깨닫지 못한 걸까. 부랴부랴 바리케이드를 친 곳에 도대체 어느 누가 술병을 갖다 놓았을 것이며, 부산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을 안전한 곳에 숨겨놓았을 것인가. 맛이 좋지만 강한 포도주. 19년 숙성되면서 향이 독한 저 포도주라면 이물질 섞인 정도로는 그 차이도 몰랐을진대, 그걸 이 아둔한 머리통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주정뱅이의 본성이 이르는 대로, 의심스러운 점에 의혹 하나 안지 못하고, 지금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벌컥벌컥 들이켜버렸으니, 결국 이 꼴이, 이런 참사가,

“안색이 좋지 않군.”

펜들턴은 손가락을 목구멍으로 밀어넣었다. 손이 토사물로 더럽혀지는 것은 상관없었다. 숨이 콱 막히는 고통도 상관없었다. 그저 당장에 이 술을 토해내야 한다는 집념만이 불결함과 고통을 잊게 했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독이 몸 안을 돌지 않게 해야, 그렇지 않다면,

“이 꼴이 될 테니까. 그렇지 않나?”

억센 손이 가련한 팔을 붙잡고 끌어냈다. 손톱이 입천장을 긁는 바람에 끄륵, 끄륵, 하는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독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눈이 따끔거리는 것도 독이 몸에 점점 퍼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저 손아귀에 저항할 힘이 생기지 않는 것도, 다리가 떨리는 것도, 입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도, 길 잃은 어린아이의 서러움에 휩싸이는 것도 전부 중독의 증거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울고 싶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던가. 소설 주인공처럼 만능이 되기는 바라지도 않았고, 그냥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시기와 괴롭힘도 없이 살고 싶었을 뿐인데. 주사위를 고쳐 던지고 싶었다. 이 패는 버린 패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트레버 펜들턴.”

코르보는 남작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다리가 허공 속에서 버둥거렸다. 밑에 있는 것은 바닥이 아닌 허공이다. 몇 미터 아래에 포석과 단단한 흙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숨이 막혀 컥컥거렸다. 이 또한 중독된 탓이리라. 그의 눈에는 호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낫만이 비춰지고 있었다. 해골가면을 쓰고, 검은 옷을 걸친 벽안의 죽음이.

“폐하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나?”

죽음이 속삭였다.

“자기 신하들의 개인적인 결함이 그 분의 귀에 들리는 일은 잦았지만, 그 결함이 그 분에 입에서 나오는 일은 없었지. 최측근은 물론이고 친척, 호국경, 가족들에게 그런 것을 밝힌 사실은 한 번도 없었다.”

호국경은 사납게 펜들턴을 흔들며 손힘을 약간 늦췄다. 그래도 펜들턴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는 손가락 하나를 반대로 꺾어버렸다. 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흐릿해지던 남작의 눈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기 짐은 자신의 힘만으로 감당하는 용기는 갖추고 있었지.”

손발이 저렸다. 시시각각 식어가는 생명의 기운에 구역질이 다시 치솟아 올랐다. 자신의 인생이 여기에서 끝날 것이라는 절망적인 확신 앞에서, 그는 벌거벗은 아이처럼 무방비했다. 태생을 알 수도 없는 저 사생아, 변변찮은 교양에 말투마저 어색했던 이방인의 손 안에서 장난감처럼 놀려지고 버려지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이 막을 내린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용기? 여제가 그것을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여제 또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부채로 입을 가리고, 남에 대한 험담으로 쾌감을 느끼는 그런 흔하디 흔한 부류의 계집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를 경외하면서도 혐오하게 만들던 감정의 근원조차도 허황된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내 인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온 건가. 누군가에게 놀림받기 위해서 태어났단 말인가. 내 인생을 연기하는 중인데 내 배역이라고는 악역 뿐이란 말인가?

“네가, 네가 독을 탔구나. 저 술에, 치, 치졸한 놈. 그, 그게, 네 복, 수 방법이었구나. 하, 하긴, 당연하지. 너한테 독을, 먹,인 장본인이었는데, 다, 당연히 그,런 식으로, 앙갚음 하고 싶었겠지. 하긴, 공정한 결,투도 아니고, 암살로 복수를 한 녀석인데, 그, 그그그게 당연하지. 서코,노스 인간들은, 하나같,이 그런 놈들, 이니까. 나, 나도 너처럼 실력 있었다면, 검을 쓸 줄만 알았다면, 형들처럼 더 잘나게 살,았을 텐데. 너랑 달리, 용감,하게 살았을 텐데. 황제의 권위에 묻어가지 않고,”

코르보는 그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말라붙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단어에 서린 것은 남을 향한 용기가 아닌 자신에 대한 자포자기였고, 이성적인 조롱이 아닌 억지로 가득한 투정이었다. 그래서 코르보는 대꾸하지 않았고, 연민조차도 느껴지는 눈길로 그 남작을 내려다보았다. 남작은 경련하면서도 입을 놀려댔다.

“……펜들턴 경.”

그렇지만 다음 말은 나오지 않았다. 펜들턴은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저주의 말을 내뱉으려 애썼다. 저 사냥개의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한바탕 조롱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일까.

“안녕히 가시오.”

안녕히 가라니,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마음 속 의문을 미처 해결하기도 전에, 펜들턴의 눈은 자신의 몸에서 뽑혀나오는 칼 끝을 좇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

코르보의 손이 옷자락에서 떨어지고, 펜들턴은 무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정작 그 입에서 나온 것은 뚜렷한 의미 있는 말소리가 아닌, 공기 새는 쇳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분수처럼 솟구치는 혈액이 눈 앞을 가렸다. 빨강. 눈앞이 온통 빨강 일색이다. 다락방을 물들이던 그 섬뜩한 색깔이, 이제 그의 눈 앞의 모든 것이었다. 마치 그 순간 같았다. 제독, 마틴과 짜고 코르보를 암살한 바로 그 날, 제국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사라지고, 오로지 불명예한 암투만이 남은 그 순간 같았다. 꿈일까? 어쩌면 꿈일 것이다. 이 추락이 끝나고 나면 침대에서 일어날 것이다. 침대 위일까, 아니면 침대 옆일까? 아마도 침대 옆일 것이다. 악몽을 꿨다 하면 어린 자신은 셀 수 없을 정도로 허다하게 굴러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악몽에서 깨어날 테고, 애초에 독을 마신 적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구를 죽이거나 속인 일도, 여자랑 놀아난 일도, 술에 빠져 살던 날도, 무엇보다 형들을 피해 저택 구석에서 울던 일도, 이 모든 것을 후회하며 뒹굴던 일도, 그 모든 것도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추락이 긴 것 같았다. 평소대로라면 금새 추락은 끝났을 텐데.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깰 꿈이라면 추락하는 순간이 길든 짧든 상관없는 것이다. 트레버, 추락은 곧 끝날 것이다. 그리고 퍽, 하는 굉음에 귀가 먹먹해지더니 정말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봐라. 정말로 꿈에서 깨고 있는 것이다. 위액으로 입안이 시큼한데, 침대에서 눈을 떠도 이 맛이 남아있다면 정말로 기분 찜찜할 것이다. 감각이 없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는 입 안을 굴러다니는 잇조각을 간신히 뱉었다. 잠이 오려는지 눈앞이 침침해졌다.

자, 이제 끝이야. 이제 꿈 속에서 잠이 든다면, 현실에서 눈을 뜰 테니까. 그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지. 비굴하지 않고 언제나 당당하고, 날 헐뜯는 소리는 웃어넘기는 인간이 이번에야말로 되는 거야. 형들이 괴롭히면 그땐 맞서 싸우면 되겠지. 꿈은 이제 꿈으로 끝내버릴 거야. 이상하네, 그렇게 싫었던 형들이 그립기까지 하니. 자, 이제 꿈에서 깨자. 하녀들이 날 깨우려고 시끄럽게 웅성거리는군.

웅성거리는 병사들은 한데 모여, 피 섞인 진흙웅덩이를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그 한가운데에 더없이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남작이 누워 있었고, 그는 마침내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매달린 실이 톡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펜들턴의 시체, 그것을 지켜보는 한 무리의 경비대, 그들을 휩싼 동요, 그리고 그 광경을 향해 똑바로 내리 꽂히는 빗줄기. 이 모든 것을 코르보는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용기 있는 누군가가 남작이 떨어진 곳을 올려다보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층계참을 천천히 내려가던 코르보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펜들턴을, 그리고 술을 찾으려 허우적대는 펜들턴을, 독에 중독되어 죽어가던 펜들턴을 생각했다. 저 장난스러운 절대자는 저 가련한 귀족의 밑바닥을 까발리고 파헤쳐서 귀족의 눈앞에 들이댔다. 저 귀족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밑바닥을 보지 않기 위해서 술을 찾아댔다. 그리고 술 안에 가득 담겨 있다고 믿은 독에 의식이 마비되고, 팔다리가 마비되고, 온갖 추태와 오해를 토해내다가 종국에는 목숨마저 잃지 않았는가. 조롱 반 충고 반이었던 절대자의 말조차도 그를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저 추태 끝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곤죽이 되어버린 인간의 시체뿐이었다. 코르보는 펜들턴이 마신 독에 대해서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오해투성이군.”

술에 독 따윈 들어있지 않았다.
어리석은 펜들턴. 결국 공포가 그를 죽이고 만 것이다.